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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Mar 12. 2021

우리 조카가 달라졌어요.

성장통

 수업을 마치고 중학교 2학년짜리 작은 조카가 잔뜩 표정이  그러 저서 집에 들어왔다. 동생은 볼 일을 보러 외출 중이었고 내가 방과 후의 아이들을 맞이하러 간식을 해놓고 기다리던 참이다. 다녀왔다는 인사도 없이 제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가 와 있으면 어김없이 아직까지 90도로 배꼽 인사를 하는 조카인데... 뒤따라 조카 방에 들어가 보니 구석에서 울고 있다. 너무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나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큰일이 난 것 같았지만 혼자 있고 싶은 그 마음도 헤아려줘야 될 것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문을 닫아주고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동생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한숨만 쉰다.

 조카가 다니는 중학교는 집에서 일곱 정거장 되는 거리인데, 조카는 버스 대신 평소 자주 사용하는 전동 휠을 이용해 등하교를 해왔다. 그런데 새 학년 첫 대면 수업 날,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오려 보니 전동 휠이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아이가 사색이 되어 온 학교를 휠을 찾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고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한 모양이다.

 평소 조카가 애지중지 하던-늘 한 몸처럼 사용하던-물건이니 얼마나 속상할지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그래도 한편으론 조카가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마냥 아기 같던 애굣덩어리 조카도 이제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진입하는구나 생각되면서 웃음이 나왔다.



 이모, 조카 사이가 워낙 친밀한 사이이긴 하지만 유난히 동생네 아이들한테 정이 많이 간다. 아마도 내가 직장 다니는 동생을 대신해서 5,6년을 아이들을 봐주면서 더 정이 든 것 같다. 거기다 나는 결혼을 일찍 해 아들이 이미 청년인데 비해 동생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출산했으니 좀 과장해서 마냥 이쁜 손주 느낌? 호호호

 내 아이 키울 때는 좀 엄하게 훈육하려고 애썼는데 지나고 보니 나의 경우엔 별로 자녀양육에 도움이 되지 않아 조카들한테는 따뜻하고 푸근한 이모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동생이 엄마 역할을 똑 부러지게 감당하고 있지만 내가 인생의 선배이자  육아 선배이니 객관적인 조언도 나의 몫이다. 그냥 전문가는 아니어도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제대로 된 성인(순전히 나의 기준이지만 인성만은 반듯하게 자랐다.)으로 키워 놓은 모든 시간과 경험이 사랑하는 동생과 조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조 양육자를 자처했다.

 참 신기하다. 아들을 키울 때는 내가 너무 젊어 철딱서니 없기도 했지만 제삼자로 동생과 아이들과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의 해법이 그려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런 것을 두고 연륜에 의한 노하우라는 걸까.



 요즘 동생은 고민이 많다. 올해 고등학교 진학한 첫째는 중학교 3학년 들어 학원 대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택하여 믿고 맡겼는데 원하는 고등학교 진학에서 실패하면서 아이가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말수도 줄어들고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일어나면 영화 보고를 반복. 곧 상급학교에 진학하는데 내심 기대하고 믿었던 아이가 힘들어하니 가슴 아프면서도 우리 아이만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함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째는 코로나 온라인 수업 이후 게임중독에 빠져 매번 아이와 씨름 중이다. 고 열다섯 살짜리 사내놈은 시월 생이라 만 십삼 세로 체구도 또래보다 작고 어리다. 성격의 기복이 좀 심한 기분파지만 마음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을 타고나서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려 하고 동네 단골가게 사장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멋진 미래의 훈남이다. 이런 나의 착하고 이쁜 조카가 학교 공부도 나 몰라라 게임만 밝히고 더욱이 제법 엄마나 아빠의 훈육(?)에 거친 목소리로 반항하기 시작했으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했는데 달랑 가지가 두 개뿐인데도 힘에 부쳐 지난번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붙임성 있고 기분이 좋을 때는 한없이 따뜻한 봄볕 같은 우리 조카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엄마, 아빠가 잔소리라도 길어지거나 혼이 날 때는- 특히 만만한 엄마한테서 긴 잔소리라도 들을라치면-아직 변성기가 안된 아이 목소리에서 제법 거친 톤으로 그만 하라고 듣기 싫다고 반항을 하는데 지 엄마는 어이없어하는데 나는 그 모습조차도-아이를 먼저 키운 선배로-성장의 한 과정을 제대로 밟으며 그렇게 커나가는 것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우리 아들 생각이 난다. 사춘기 때 크게는 아니어도 순둥이 아들도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나를 힘들게 했었다. 너무 속상해 매를 들면 매를 잡고 안 놔주니 힘이 달린 나는 더 약이 올라 있는 힘껏 소리치고 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번의 별거로 내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더욱더 잘 키워야지 하는 욕심이 앞서 좀 느긋하게 기다려 주지 못했다.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만약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의 어릴 때로 돌아가 더 많이 사랑해주고 품어주고 기다려주고 싶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조카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가슴에 안긴다. "이모 죄송해요. 사랑해요."하고 고개를 떨군다. 제 딴에는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방으로 따라간 내게 나가 달라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많이 속상했지? 이모도 속상해. 이모가 사랑하는 거 알지?"하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모 핸드폰 잠깐 빌려주시면 안 돼요?"

 "게임 지금 하는 시간 아닌데 미안해 안돼."

 "게임 안 하고 유튜브 종이접기 영상 볼 거예요."

시간을 보니 동생이 올 시간이 이, 삼십 분 남았다. 엄마 올 때까지라는 그리고 거실에서 보라는 단서를 달고 휴대폰을 빌려줬다. 금세 퉁퉁부은 얼굴이 환해진다. 싱긋 웃기까지 한다. 저 미소가 나를 행복으로 물들인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들어왔다. 조카가 제 엄마 품에 안겨 서러운 듯 눈물을 훔친다. 동생이 얼마나 속상했냐고 아이의 마음을 만져준다. 조카는 마음이 조금 풀린 듯 직접 가꾸는 토마토 화분에 물을 주고 키우는 거북이에게 먹이를 준다.

 나는 저 맑고 따뜻한 아이에게 먹일 영양만점의 백종원표 오므라이스를 준비한다.



 내가 사계절 중 제일 좋아하는 봄이 왔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시리고 혹독한 추위도 견딜 수 있었다. 이제 계절은 조금씩 생명의 빛깔을 입는다. 조카들을 보며 어리고 여린 그러나 단단한 생명력을 지닌 꽃망울이 연상된다. 어떤 꽃으로 피어나게 될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 모든 꽃들은, 생명은 아름답다. 들에 핀 이름 없는 들풀들도 하나하나 제각각 아름답다.

 이제 막 봄의 계절로 접어든 조카들을 보며 마지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넓은 품으로 아이를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격려해 주는 일이 아닐까. 집에 화분에 식물이 곧게 자라도록 지지대를 세워준다. 나와 동생 그리고 우리 모든 어른들이 그 지지대의 역할을 감당할 때 세상은 울긋불긋 꽃빛으로 물들어 고운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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