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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Mar 29. 2021

그대가 머물고 간 정원.

 바람 잘 날 없는 나의 마음이 오늘은 다행히도 고요하고 잔잔하다. 어젯밤 뒤척이다 늦게 잠이 들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몸이 가뿐하다. 몸이 힘들지 않으니 자연스레 마음까지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평안하고 감사하다. 늙느라고 그런지 여기저기  몸에서 삐걱거리긴 한데 그래도- 약골이지만- 그런대로 별 다른 병 없이 지금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감사하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만 하다가 요즘 빠르게 걷는 운동을 시작해 점점 운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고 며칠 전부터는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제일 무게가 적은 아령을 구입해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봄맞이 다이어트용으로 군살을 빼기 위해 시작했는데- 워낙 근육이 없는 체질이라- 장기적으로  노년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지금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자세가 안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오십견이 와서 그런지 목이랑 왼쪽 어깨가 결린다. 부실한 것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떨어지는 체력이  한몫할 것이다. 언젠가 다이어트할 목적으로 욕심부리다 얼마 못가 포기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욕심과 지나친 의욕은 내려놓고 조금씩 생활 속에서 운동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하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는 급하게 겨울에 찐 살들을 빼기 위해서 식사조절만 하였는데 빠지라는 살은 그대로 있고 -원래도 영양의 균형을 갖춘 식사보다 오로지 한 끼를 때울 목적의 식사를 하던 나이기에-피로감만 몰려왔다. 몸이 늘어지니 자연스레 매사 의욕도 없고 마음이 더욱 우울해졌다.



 나이 듦. 그것은 아무리 곱게 포장해도 서럽고 슬픈 일이다. 젊었을 때는 그 반짝이는 광채를 미처 알지 못했는데 이제 멀리 떨어져서 돌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연륜이 주는 지혜와 원숙함 또한 아름답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애잔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꽃이어서 빛나던 시절을 그때 이미 깨달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젊음이 부담스러워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궁금해졌다.

 

 어제부터 내리는 봄비는 그칠 줄 모른다. 촉촉하게 젖어 물기를 머금은 꽃들이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춤을 춘다. 떨리는 가슴으로 꽃과 비의 우아한 왈츠를 지켜본다. 물 흐르는 듯 유연한 몸놀림이 기품 있고 단아하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온 동네가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만개한 담장 위의 개나리와 목련이 그리고 이제 막 웃음을 터트린 수줍은 벚꽃들이 이 비에 스러질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그것 또한 자연의 이치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순환한다는 우주의 섭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치 개나리 흐드러지게 핀 담장 끝에 명희 씨 카페가 보인다.



 소녀 같은 그녀의 얼굴이 나를 반긴다. 나도 싱긋 웃으며 그녀의 인사에 화답해 주었다. 나이 들면 사람마다 얼굴의 전체 분위기에 그 사람이 살아온 마음의 결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아름다움과 추한 느낌과는 다르다. 오랜 시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난다. 그래서 흔히들 나이 먹어서의 얼굴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명희 씨는 마음결이 고운 사람이다. 얼굴에 소녀다운 수줍음과 선함이 깃들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갑자기 내가 들여다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가 궁금했다. 잘 살고 있는 것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 고마운 지인들이 많은 것을 보니 인심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지금까지의 삶과 삶의 태도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남은 인생은 더 많이 베푸는 넉넉함으로 채워나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뜨거운 커피를 눈으로 먼저 마시고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그 진하고 깊은 맛에 삶의 고단함과 걱정거리가 잠시 사라진다. 이쯤 되면 커피 아니 정확히 카페인 중독 환자이다. 혼자 멋쩍어 피식 웃었다.


 그녀의 카페엔 그녀의 친한 지인들이 종종 머물고 간다. 내가 단골이다 보니 그녀의 친구들과도 자주 보게 되고 자주 보다 보니 친근해져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나란 사람이 원래는 낯가림이 좀 심한 편인데 나이 들면서 좀 뻔뻔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느 순간부터 낯선  사람들을 보면 긴장하던 마음이 스르륵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 때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젊었을 때는 좀 새침데기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좀 편한 아줌마 캐릭터로 나름 이미지를 변신 중이다.



 명희 씨가 그녀의 카페를 꽃이 가득한 정원으로 꾸몄다. 노란 프리지어, 핑크색 카네이션, 빨간 장미 그리고 이름 모를 꽃 화분들까지 창가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그녀와 내가 머무는 정원에는 꽃 향기가 가득하다. 그녀의 지인들이 우산을 접으며 걸어 들어온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초로의 중년 여성들이 그녀의 사랑과 정성으로 꾸며진 정원에 앉아 물오른 꽃들의 노래를 귀담아들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린다. 변함없는 그녀의 넉넉한 손길이 다과를 나누고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내 자리에 앉아 그녀가 차린 만찬을 즐기며 삶을 읽고 글을 쓴다.

 

 "은경 씨, 커피 연하게 한 잔 더 줄까요?" 하고 명희 씨가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잠시 쓰던 글을 멈추고 작지만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을 둘러본다. 소탈하고 소녀 같은 그녀가 가꾸는 뜨락에 잠시 손님으로, 친구로 머물지만 내 둥지같이 푸근하다. 그것은 그녀가 진심으로 나와 그녀의 이웃들을 사랑으로 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저물어 가고 싶다.



 집으로 돌아갈 무렵 비가 그쳤다. 다행히 이번 비로 꽃이 지지는 않았다. 날쌘 걸음으로 빵집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바게트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토마토와 치즈를 넣어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청소를 하기 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비가 온 뒤라 대기가 깨끗하다. 열심히 걸레질을 하며 몸을 부지런히 놀리고 이어서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계획한 운동을 시작한다. 몸은 마음을 담는 곳이다. 건강하고 넉넉한 마음이 깃들 수 있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땀을 흘린다.


 명희 씨가 가꾸고 있는 그녀의 정원이 생각났다. 지금 내 안의 정원을 들여다본다. 막 피기 시작한 꽃들과 잡풀들이 뒤엉켜 있다. 다 뽑았다고 생각한 잡풀이 마음 구석에서 한치나 자라 있어 새롭게 자라나는 꽃들을 가리고 있다. 손을 뻗쳐 그것들을 하나하나 뽑는다. 그리고 빈 공간에 색색의 봄꽃들을 심고 물을 준다.

 나는 지금 나의 정원에 필 꽃들을 상상하며, 나의 정원에서 편히 머물며, 마음을 나누고 갈 손님들을 위해 나만의 만찬-사랑과 배려와 신뢰를 준비한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쉽지 않다. 순간 게으름을 피우면 어느새 잡풀들이 무성해서 애써 가꾼 꽃들을 망치곤 한다. 나도 한때는 수풀만 우거진 이름뿐인 정원에 살고 있었다. 내가 이웃을 초대할 마음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나의 황무지에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풀 속에 작지만 단단한 꽃 봉오리를 발견했다. 죽어 있는 나에게 바람이 가져다준 희망의 씨앗이었다.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보며  안에 존재하는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열정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마음밭을 가꾼다. 정원의 형태는 되찾았지만 아직 초라하다. 가끔씩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영락없이 잡초가 쑥쑥 자라 원래 제자리 인양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에게 내 정원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내가 가꾸는 정원에 바람과 햇살과 새가 깃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본다. 젊은 날의 그림자는 희미해 가지만 초라하지 않은 여인이 서 있다. 삶에 대한 환상은 꿈꾸지 않는 그러나 삶의 정원을 소중히 가꾸는 그녀가 만든 정원에  언제든 외로운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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