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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Mar 31. 2021

그녀들의 수다.

 눈부신 햇살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오늘도 하루가 열린다.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눈을 뜬다. 이틀 동안 내린 비에도 여전히 씩씩하게 버텨준 꽃들이 대견하다. 바람이 부니 벚꽃들이 날린다. 그 그늘 아래를 꿈속 인양 걸어간다. 나의 봄날은 그렇게 여물어간다.

 어제저녁에 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애들이 이번 주 대면 수업이라 하교할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모처럼 자매가 느긋하게 점심이라도 같이 하면서- 봄의 정취를 같이 느껴보자고 했고, 동생도 별다른 약속이 없어 오늘 만나기로 했다. 어디 좀 멀리 바람이라도 쐬면 좋을 텐데 코로나로 확진자 수가 연일 수 백 명씩 나오니 불안하기도 해서 집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내가 동생네 가서 조카들의 간식과 식사 준비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할 일을 하다 보면 동생과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새 학기에 휴직해서 사실 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지만 아직 일자리를 못 구한 언니를 배려해서 내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자주 볼 수록 원래 할 말이 많기도 하지만 어릴 적은 참 많이 다퉜는데 나이 들수록 자매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좋은 일이다.

 한동안 단벌신사처럼 거의 같은 외투만 걸치고 외출했는데 립스틱도 곱게 바르고 옷장 속을 한참 뒤적여서 가장 근사한 봄 트렌치코트를 골라 입었다. 거울을 보니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얼마 전 까지는 나름 멋쟁이였는데 이상하게 최근 1,2년 사이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도 있긴 하지만 별로 치장하는 게 관심 없고 시들해졌다. 선배들이 한참 꾸미는 것도 한때라고 가꾸고 싶을 때 열심히 가꾸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그래도 오늘은 예전의 나처럼 꾸민 듯 안 꾸민 컨셉으로 제법 멋을 부렸다.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동생은 나 보다 두 살이 어리다. 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제 또래 엄마들에 비해서 아이들이 아직 한참 어리다. 아이들 나이가 곧 엄마 나이라고 하는 농담이 있듯 그래서 그런지 학부모 마인드고 오십 초반인데도 참 젊게 산다. TV랑 연예인들의 근황들에 관심 없고 무심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좋아하는 배우, 가수 등 다양하다. 한동안 이준기라는 배우에 빠져있다가 옹성우라는 배우 겸 가수에 열성적인 팬으로 활동하다가 이제는 그룹 국카스텐의 리드 싱어 하현우에  푹 빠져 내게도 종종 그의 음악을 공유한다.

 얼마 전에는 하현우가 직접 제작한-한정 판매한-티셔츠를 겨우 구입했다고 자랑스레 내게 보여 주었다. 자기 딸은 오히려 연예인들에 무심하고 시니컬한데 엄마라는 동생은 반대로 주책맞게 열성적이다. 아이들이 어리듯 동생도 아이들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따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막 시작한 갱년기의-제2의 사춘기를-허무함을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달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보컬 하연우에 대한 팬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그런 동생을 주책맞다고 말로는 타박을 했지만 사실 그런 동생이 우스우면서도 귀엽다. 가슴속에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테니 참 다행스럽다. 그녀의 무한한 에너지가 직장 생활과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를 조금은 날려주지 않을까.



 밥은 뒷전이고 동생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난 어떤 자리든지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수다스러운 거랑은 거리도 먼 사람인데  오늘은 제법 주고니 받거니 말을 섞고 맞장구를 쳐준다. 별 나이 차이도 안 나지만 신나게, 화제도 다양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가는 동생이 -우리 소녀적 늦은 밤까지 소곤소곤 대다 잠이 들었던 추억까지 떠올리게 하니 -한참 어린 사춘기 소녀같이 느껴져서 쿡쿡 웃음이 나왔다.

 동생도 원래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천생 여자였다. 직장 생활 초년병일 때는 순하디 순한 것이 직장에서 이리저리 차이고 스트레스를 받더니 어느 순간부터 불의와 부당함에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더니 철의 여인으로 등극하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 번 변한다는 말이 정말 맞는 듯하다.

 세파에 시달려 잔뜩 주눅 들고 기가 죽은 내가 보기에 당연히 동생의 당당함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편이 아리면서 안쓰럽다. 그건 어쩌면 동생도 나를 보면서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서로 예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니 -사는 모습, 상황에 따라 있던 성질도 죽고 없던 성질도 생기니-참 인생의 묘하다 못해 요지경 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좋아하는 가수의 히스토리와 요즘 근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다 다시 아이들 이야기로 넘어가더니 풀이 죽는다. 예전에 동생이 내가 사춘기를 겪는 아들을 보며 힘들어할 때 책에서 나오는 교과서식 해법을 내게 제시하곤 했는데... 막상 자기의 자녀들을 키우다 보니 이론과 실제 상황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모양이다.

 세상일이 뜻대로 안 되는데 하물며 자식일이 뜻대로 되겠냐고 동생한테 위로해주니 긍정적인 그녀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다시 스러져가는 젊음과 허무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히 드리우는 나이 듦-그 의미에 대해 다시 폭풍 수다를 떤다. 나도 그 주제에는 솔깃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러고 보니 동생 눈가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항상 어리게만 생각했는데 동생도 어느새 세월의 훈장들을 여기저기 달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하니 울렁거린다.

 최근 1,2년 전부터 거울을 보면 웬 나이 든 여인네가 처량 맞게 나를 바라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동생도 비슷한 과정을 이제 막 겪기 시작하는구나 생각되니 마음이 씁쓸하고 짠했다. 아직 조카들이 아직 어리니 아이들 눈에 나이 든 엄마로 비칠까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기억력도 쇠퇴해 자주 깜박거리니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녀에게 확 몰려왔다. 그러니 마음이 갈 곳을 몰라 우울함과는 거리가 먼 동생도 아이들과 같이 사춘기를- 성장통을- 앓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들고 벚꽃이 만개한 집 앞 공원에서 동생과 내가 나란히 걷는다. 오전에 나쁨이던 미세먼지가 다행히 보통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바람이 부니 벚꽃잎이 눈처럼 쏟아진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그녀와 내가 서있다. 오십 대 두 여인이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며 스러져 가기 전의 찬란한 아름다운 그 풍경을 온몸에 각인시킨다.

 벚꽃 그늘 아래의 벤치에 앉아 동생과 내가 하늘을 본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모처럼 맑은 하늘이 가을빛을 닮아있다. "너 아직 짱짱해! 너 아직 내가 보기에 고와! "하며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등을 두드린다. 그녀가 깔깔 웃으며  "언니도~~"하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정오에 시작한 동생과 나의 수다 삼매경은 아이들이 학교를 파할 무렵 끝이 났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우상- 하현우의 낼 출연할 프로그램의 시청을 당부하고 사라졌다. 난 그녀의 부탁을 아마 들어줄 것이다. 때로는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만 그런대로 귀여운 그녀이다. 그것은 그녀가 훨씬 나이가 들어도 내 눈에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항상 언니이듯 그녀는 항상 나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벨이 울린다. 동생이다. 복면가왕에 게스트로 출연할 하현우의 오랜만의 티브이 출연에 응원과 힘을 실어 달라 때를 쓴다. 동생 덕에 덩달아 하현우 음악에 심취한 적도 있었는데 그까짓 부탁쯤이야 뭐 식은 죽 먹기이다. 이래저래 유쾌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멀리 별들과 꽃들이 달빛을 마주하고 소곤소곤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이 든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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