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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Apr 06. 2021

집순이 놀이터에 가다.

 벌써 4월이다. 문득 새해를 맞이해서 새롭게 시작한 계획들을 생각해보니 -몇 달 안 가서  흐트러진 계획이 있어 -지금이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야 할 때라 여겨졌다. 독서는 1,2월에는   목표량을 초과하는 열정을 보이며 순조롭게 출발했는데 3월 들어서 목표량의 절반만을 채우고 마감했다. 운동은 걷기에서 얼마 전부터 조금씩 근육 운동을 시작해서 아직은 그런대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고, 글 쓰는 것은 지금 이대로만 나간다면 목표치를 크게 상회할 것이다. 물론 쓰는 양보다는 질적인 깊이가 중요하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그 부분도 나아지지 않을까.

 

 참 요즘 내가 세운 계획 중에 많이 흔들리고 위태로운 것이 있다. 올해 필수품 이외의 나를 꾸미는 옷과 소품들을 사지 않는 것도 나의 새해 계획 중 하나였다. 짐을 늘리고 싶지 않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마음도 있었,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져서 옷장의 봄 옷들을 정리하다 보니 변변하게 입을만한 옷들이 없다. 낡고 오래된 것은 재활용으로 내놓고,  아끼는 옷들만 남겨뒀는데- 죄다 칙칙하니 봄빛과 어울리지  않는다. 1,2년 전부터 불필요한 살림을 늘리지 않고 쇼핑을 끊고 살았는데 올해는 화사한 봄옷 생각이 간절히 나서 유혹을 이기기가 힘들다. 몇 번을 온라인 쇼핑몰에 화사한 블라우스랑 스카프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고민하다 그다음 날이면 삭제하기를 벌써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지금 7개월째 구직활동 중인 나한테는 쇼핑은 남의 일인데...  아직 마음의 수양이 부족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니 내심 한심해서 아침부터 반성 모드로 풀이 죽어있다.



 말 그대로 화창한 봄날이다. 햇살이 눈이 부시고 여기저기 꽃향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날이다. 하늘 빛깔까지 고운 푸른색이다. 명희 씨 카페에서 명희 씨가 준 구운 달걀과 커피를 아침으로 대신하고,  이제 막 본격적으로 글을 쓰려하는데 자꾸 창밖의 진달래꽃이 내게 아는 척을 한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내게 자꾸만 말을 건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수줍은 아가씨처럼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라 땅으로 내려올 줄 모른다.

  

 휴대폰 벨이 울린다. 동생이다. 봄옷을 장만하러 백화점으로 오후에 쇼핑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취향은 많이 다르지만 동생은 물건을 살 때 내 의견을 많이 참고하는 편이다. 잠시 멈칫하고 있는데, 동생이 만날 시간을 정하고 부리나케 전화를 끊는다. '그래 괜찮겠지. 윈도쇼핑만 하고 오면 되지. 소심하기는...'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얼마만의 백화점 외출인지 멋지게, 화사하게 디스플레이된 옷들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치를 보니 옆에 있는 동생도 오랜만의 오프라인 쇼핑이라 잔뜩 기대와 흥분에 부풀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마음에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1년쯤 아르바이트로 국내 여성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판매일을 했으니-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백화점은 나의 놀이터였다. 원래도 옷이니,  소품을 좋아하던 나인데 좋아하는 것들을 실컷 볼 수 있는 백화점에서의 근무는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처음 하는 일이라 의욕도 넘쳤고 주위 매장 직원들이랑 어울리고 사귀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 못 갔다. 우리 인생길 도처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나의 즐거운 백화점 생활에도 복병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매장 매니저였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그녀는 백화점 내에서도 호랑이로 소문난 여장부였다. 사실 근무 한 달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초보라는 사실을 매니저도 잘 아는 사실이었고,  어리바리하게 실수하는 날도 별 타박 없이 넘어가곤 해서 그저 무던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기간은 아마 매니저가 초짜인 내가 일을 익히기 위해 기다려 준  배려 기간이었던 것 같다.

 행복했던 기간은 거기까지였다. 한 달쯤 넘어서니 내가 혹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소리부터 지르는 호랑이로 본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바보 같은 건지 그전에 다른 매장 직원들이 조심하라고 귀띔해 줄 때도 개의치 않고 설마 하고 지나갔었는데 , 막상 욱하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이 직장상사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때려치우기에는 내 형편도 여의치 않았고 한편으로는 이 직장에 빠르게는 며칠 만에 길게는 한, 두 달 만에 그만뒀다는 이름 모를 선배들의 전철도 밟기 싫었다. 그것은 오기였다.


  가뜩이나 소심한 내가 그녀의 빈번한 불호령에 눈물을 쏟은 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직접적으로 찍 소리 한다는 것은 고작 "매니저님처럼 나한테 막 대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는 소리나 하니 매니저는 나를 딱하듯 쳐다보며 "온실 속 화초네 언니는..."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일은 힘들었고 가끔씩 쏟아지는 폭풍 야단에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었지만 힘이 부칠 때는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하고 외치는- 만화의 여주인공 캔디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참고 참았다.

 그러다가도 심하게 욱하고 성질이 날 때는 짬을 내어 백화점 내 그릇 코너나 다른 층의 옷 매장을 기웃거리며-고 예쁜 것들을 보며-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이상하게도 가지고 싶은 것들을 실컷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여우보다는  곰에 가까운 나이지만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반년을 넘기니 눈치도 제법 볼 줄 알고 호랑이 그녀에게-내 평생 아무한테도  못 부려-본 애교를  떨며 그렇게 화초에서 잡초로 변해갔다.



 "언니, 이 원피스 어때? 나 이런 스타일 어울릴 것 같아?"하고 동생이 묻는다. 시폰 소재의 하늘하늘한 핑크빛 원피스다. 동생의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입어 보라 권했다. 따끈따끈한 새 옷들이 내 눈을 맞추려 이곳저곳에서 손을 든다.

 한참을 매장 안의 옷들과 눈을 맞추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블라우스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다가가 옷을 받쳐 들고 거울 앞에 선다.

 "입어보세요. 고객님~"하는 직원 말에 가격 텍을 슬쩍 본다. 만만치 않을 줄 알았지만 내 요즘 생활비의 사분의 일 가격이다. 옷을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고 매장 앞 매대의 옷들을 살펴보는데 동생이 피팅룸 밖으로 우아하게 걸어 나오더니 거울을 보고 매우 흡족한 듯 웃는다.



  큰일 났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우리 브랜드가 1년에 두 번 백화점 대행사장에서 행사를 진행하는데 -점심시간 다른 알바 언니랑 교대하고 쭉 내가 있는 사이 -트렌치코트가 하나 사라졌다. 점심 전에도 분명히 본 상품인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격이 만만치 않는데... 눈 앞이 캄캄했다. 성질 더러운 매니저한테 또 혼날 생각을 하니 입이 안 떨어졌지만 할 수 없이 입을 떼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작정하고 훔치려는 도둑을 어찌 막겠어요. 언니 오늘 행사장서 수고하셨어요." 하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후를 기점으로 나도 우리 매니저한테 마음을 열었다. 불같은 성정이라 나의 심장을 종종 오그라트렸지만 진상고객, 갑질 하는 고객 앞에서는 제 식구를 제대로 감싸 주었던 사수이다. 비록 코로나로 매장 상황이 악화되면서 매니저 일인 근무 체재로 바뀌면서 이별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혼자서 매장을 잘 꾸리고  있는지,  덩치에 비해 몸은 허약한데 건강은 어떤지 궁금해 문자로 가끔 안부를 묻는다.



 동생한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녀가 계산하는 사이 맘에 쏙 든 블라우스를 바라보다 그냥 급히 눈길을 거뒀다. 마음속으로 괜찮아하고 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서, 너 가지 대고 있는데, 갑자기 동생이 "언니 ~맘에 드는 거 없어? 언니 생일 그냥 지나쳤잖아. 비싸지 않은 걸로 하나 사줄게. 하하하. "하고 웃는다.

 "그래? 정말? 호호호 "웃으며 매장에서 동생이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 푸른빛이 고운 스카프를 하나 골랐다. "나 이거 너무 갖고 싶은 거야. 생일 선물 퉁쳐. 알았지? 고마워. 잘 받을게."하고 활짝 웃었다.


 오랜만의  나들이이자 여인들의 채집활동은 반나절만에 끝나고 동생은 원피스를,  나는 스카프를   가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낮에 본 블라우스가 눈 앞에 아주 쪼금 밟히기는 하지만 동생한테 내색을 안 하고 스카프를 고른 것은 비싼 블라우스가 지금 내 형편에 맞지도 않거니와 새해 스스로에게 검소하게 소박하게 살기로 다짐한 계획과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와~~ 역시 내 고급진 안목으로 탁월한 선택을 했다. 스카프를 가지고 있던 여러 옷에 걸칠 때마다- 한결 봄 분위기가 나는 것이 기존의 옷이 살아난다. 오늘의 나들이는 대성공이다!


 미뤘던 독서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3월 중에 완독을 했어야 되는 책이었다. 몇 장 보니 눈도 피곤하고 졸리다. 오늘 놀이터에서 신나게, 즐겁게 놀아서 그런지 체력이 바닥났다.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불과 이, 삼 년 전만 해도 날아다녔는데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책을 덮고 올 해의 계획을 다시 되짚어본다. 자잘한 계획은 좀 가지치기를 하고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을 마음에 새긴다. 열심히 사고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 소박하게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것.- 이것이 2021년 내가 바라는 희망사항이자 실천사항이다.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거울 앞에 선다. 주먹을 불끈 쥐고 멋쟁이 아줌마가 외친다. "넌 잘할 수 있어. 아자아자! 파이팅!!!" 창밖의 졸고 있는 달님이 깜짝 놀라 바라보다 활짝 웃는다. 나도 달님과 눈 맞춤하며 빙그레 웃는다. 그렇게 도란도란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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