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이라는 역사의 가정 속에 찾아보는 '약'의 이야기
우리는 흔히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물론, 클레오파트라 코 높이를 언급하셨던 파스칼 같은 분은 예외이지만...
하지만,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찾아보는 것은 다양한 관점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좋은 상상력이다.
제약회사 연구원이자 유기화학 전문가인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역사를 이루는 것은 인물, 천재지변 뿐만 아니라 전염병 등 질병도 그 지분을 무시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물론이다. 스페인이 아즈텍문명에 천연두를 선물한 것은 유명한 식민 수법이 아니던가...) 이러한 질병을 다루는 약품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며서 역사의 만약을 상상해보자고 우리들을 꼬시고 있다. 난 그 꼬임에 넘어간다.
책은 비타민C, 퀴닌, 모르핀, 마취약, 소독약, 살바르산, 설파제, 페니실린, 아스피린, 에이즈 치료제 총 10가지의 약에 대한 탄생과 그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
15세기 대항해시대에 선원들의 가장 큰 공포는 삼켜 들듯 달려드는 폭풍우도, 배신으로 점철된 선상 반란도 아닌 괴혈병이였다. 영국이 19세기에 거의 모든 대륙을 휩쓸고 다니면서 식민지를 건설한 것도 감귤류의 비타민C 효과를 밝혀낸 군의관 제임스린드의 실험을 토대로 한 괴혈병 정복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괴혈병의 원인물질을 밝혀내고 비타민C를 발견한 과학자들의 논문 스파이 이야기는 그 흥미를 더한다.
청나라 강희제가 정복여정 중 말라리아에 걸리자 선교사 건넨 퀴닌을 먹고 살아남으로써 청의 역사는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사례로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을 소개한다. 알렉산더 대왕, 단테, 크롬웰 등 역사 속 중요한 인물들이 말라리아로 그 생을 다했다는 '설'과 함께 로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말라리아로 인해 죽음의 콘클라베가 되었던 이야기는 질병에 속수무책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자극한다.
이후 퀴닌의 발견과 인공 합성 과정에서 염료 개발로 대박난 윌리엄 퍼킨의 사례 등은 흥미롭다.
모르핀이 우리 몸의 엔드로핀 생산 공정을 공격해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것보다 영국이 뻔뻔하게 국가 주도하에 마약 신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무기로 중국을 망친 이야기가 더욱 야비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영국은 비틀즈말고 세계에 공헌한게 뭐가 있지?)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인간의 의식라는 미지 영역에 동작하여 의학의 진보를 가져다 준 마취제.
감염 걱정 없이 병원을 다닐 수 있게 한 소독약.
프랑스 샤를8세 군대에서 감염된 매독이 각 나라로 퍼져 청교도 혁명과 미국 건국이라는 저자의 비약과 상상력이 놀라운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
세계 대전 속에 감염증을 극복한 설파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 우연의 발견 페니실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아스피린.
AIDS 원인 바이러스 발견과 의약계의 흥미로운 논쟁 등
약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사례 중심으로 미시적으로 풀어내다가 세계사의 거시적인 시점으로 조망하는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간혹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저자의 뇌피셜(?)과 가설의 도약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지만, 현 인류가 누리고 있는 삶의 질이 결코 만만치 않은 질병과의 투쟁을 거쳐 진행되어 왔으며, 약국과 병원에서 아무렇지 않게 찾는 약들의 사연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나름의 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