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생각. 책이 읽히지 않을 때

따로 노는 독서 이야기

by 말로

책을 읽다 보면, 논두렁 발 빠지듯 책의 행과 행 사이를 비틀 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읽기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한 단락, 한 단락이 마치 감옥의 창살이라도 되는 듯 답답하기만 하다.

연주자의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터너와 같이 진도가 술술 잘 나가는 책이 있는 반면에 방금 읽었던 문장을 읽고 또 읽고, 눈으로 글자를 담긴 하지만 구멍 뚫린 비닐봉지 마냥 질질 흘리고 다니는 책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책이 있고, 나에게만 그런 책이 있기도 하다.


내가 생각한 몇 가지 이유다.


첫째, 나한테 너무 어려운 책일 때.

내 읽기 욕망이 나를 너무 모르고, 자기 혼자 뛰쳐나가는 경우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이 ‘20세기 소설의 혁명’,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이라는 명성을 느끼고자 시도했다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친숙하지 않은 철학으로 감싸여 있을 때, 마주하는 좌절감이 대표적이다.

언제 가는 당신의 의식 속에서 함께 뛰놀 수 있겠죠?

또는, 제목으로만 익숙한 <순수 이성 비판> 같은 고전에 대한 도전은 지적 욕망과 나의 지식의 체계를 다져보겠다는 의욕이 만들어내는 공갈빵일 뿐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지적 과욕을 덜어낸다. 무엇이든지 힘이 들어가서 잘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회사 일도 그렇고, 가정 일도 그렇고 얼마나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했느냐는 것이 잘하고 오래 할 수 있는 길이다. (힘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어릴 적 학원 연단에서 힘 있게 외친 웅변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읽기 어려우면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하고, 다른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관심 있는 주제라면 그것보다 쉬운 책 혹은 해설서를 읽어보며 감을 잡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읽겠지라는 생각으로 나중을 기약하며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 두면 된다. (계속 쌓여만 간다는 것이 좀 찝찝하긴 하다…)


둘째, 나한테 너무 불편한 책일 때.

책 읽는 경험은 진심으로 개인 취향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서점에 들러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혹은 SNS에서 화제가 된 책을 호기심과 왠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내지는 트렌드에 대한 자기 과시에 이끌려 읽을 때가 가끔 있다.

그렇게 만나는 책들은 확률적으로 나한테 안 맞는 경우가 많다.

너무 오글거려 감정의 알레르기가 일어나거나, 긍정의 효과를 너무 과장하거나, 맹목적인 성공을 위한 천박한 자기 계발 방법 등…

한번 잡은 책은 끝까지 읽어 보려는 강박증으로 인해 중간에 포기도 하지 않은 채, ‘이 시간에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라는 자책으로 읽는 시간 대부분을 채운다.

해결책은 강박증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다.

언제든 나와 맞지 않은 책과 만날 수 있으며, 궁합이 안 맞는다 싶을 때는 바로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는 무시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곤란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인식에 반하는 의견을 담은 책들과 만날 경우다.

혹은, 전혀 관심이 없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분야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편향의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편향되지 않은 책 읽기를 위해서 나름 토론식 책 읽기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책 읽은 과정 자체를 토론이라고 생각하고, 반대편 패널이 되어 저자와 싸워보는 경험을 한다.

물론, 저자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또한 내 생각의 틀이 또 다른 차원에서 깨졌다고 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생각이 너무 많을 때.

한마디로 책 읽을 때가 아니다.

머릿속은 복잡한 일로 가득한데 양금미옥 같은 문장이라 한들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럴 때는 잠깐 눈을 붙이고, 생각의 부유물들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 박에 없다.

아니면,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와 함께 LA 밤거리를 쏘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의할 점은 그만둘 수 있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 (매월 1권씩만 읽으려는 원칙을 세웠지만 금연보다 힘들다.)

잭도 읽고, 드라마도 보고... 해리 보슈 당신만 볼 수 없잖아요...


이 밖에도 그냥 이상한 책들도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파파고나 구글 번역기에 Copy&Paste 수고 조차 하지 않은 듯한 번역으로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책들.

TMI 수준을 넘어 마이크로 렌즈로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쓸데없는 사생활로 가득 찬 책들.


특별한 책 선택의 루틴(목차, 서문, 추천, 서평 등등)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읽는 나로서는 이런 책들과 만날 기회가 많다.

하자만, 이런 비틀거리는 읽기 경험들이 결코 해서는 안될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경험들이 있어야 나 스스로를 알 수 있고, 나에게 맞는 책과 편향된 마음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애써 위로해 본다.



나와 우연히 만나는 책들도 다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책 생각. 나는 책을 왜 읽는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