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무렵, 태풍이 오기 전 법환포구에는 방송사 장비가 도착한다. 곧 태풍이 몰아치고, 안전모와 우비를 쓰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아나운서는 태풍이 우리나라에 도착했음을 중계한다. TV에서 우리가 보는 그곳이 바로 막숙포로(幕宿浦路)이다. 해녀들의 생활이 잘 보존되어 있는 법환마을에 용천수가 흐르는 ‘막숙’이 있다.
막숙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일어선 다음에도 목호들은 천성이 난폭하고, 호전적이어서 제주도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는데 이를 '목호의 난'이라 한다.
공민왕 23년(1374)에 임금은 최영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케 하니, 최영장군은 군사 25,605명을 병선 314척에 태우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그들을 격퇴하는데 목호의 잔당들이 법환마을 앞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최영은 법환포구에 막을 치고서 군사를 독려하며 목호의 잔당을 섬멸했다. [법환향토지]
* 목호 : 제주에 설치한 목장(아막阿莫)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몽골인(胡)
* 명월포(明月浦) : 현재의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즉 이곳은 몽골 지배 100년의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역사의 격전장이고, 최영장군이 막을 쳤던 곳이 '막숙'이다.
10여 년 전 법환포구에서 ‘막숙포로’라는 도로 간판을 처음 보았다. 낯설고 신비스러운 이름이었다. 서귀포에 이주한 후 자주 그곳을 걸었다. 볼 곳도 먹을 곳도 많아 걷기 좋은 동네였다.
어제 카메라를 들고 다시 찾은 그 길에는 햇빛이 넘치고 있었다. 황홀할 만큼 눈부신, 바다에 떨어지는 그 빛들을 즐기며 막숙포로 초입에서 법환포구까지 걷는다. 1.3km. 바다에 자꾸 시선을 빼앗겨 멈추어 사진을 찍어도 30분이면 걷는 길이다. 우리 엄마 모시고 휠체어 밀면서 가도 좋을 만큼 평탄한 도로에 외국인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든다.
그 길은 여전히,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햇볕과 바람과 바다가 하나 된 곳이다.
막숙에는 동가름물과 서가름물이 있다. ‘가름’은 동네를 말하는 제주어로 동가름물은 동쪽에서 나는 물이고, 서가름물은 동쪽 동네로 이어진 길가에서 솟아나는 물이다. 포구 옆 자연 용천수이기에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마을 주민의 식수로 활용되었을 만큼 맑고 깨끗하다. [Visit Jeju]
1. 대우정 : 제주 서귀포시 이어도로 866-37
(* 대우정은 막숙포로 위쪽에 있다.)
대우정에서는 전복 돌솥밥을 즐겨 먹는다. 어릴 적 반찬이 별로 없던 때 더운밥에 마가린 비벼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몸에 안 좋다고 들은 후로는 거의 먹지 않는 마가린을 대우정에선 기꺼이 먹는다. 전복이 듬뿍 올려진 돌솥밥에서 밥을 적당히 덜어내어, 따로 둔 마가린 한 스푼, 양념장을 넣고 쓱쓱 비비면 독특한 고소함이 입안 가득해진다. 제주시에도 대우정이 있지만, 서귀포 시내에서 30년을 했다는 주인아저씨는 아무 관련 없는 집이라고 한다.
2. 카페 아뜰리에안
이곳은 위치가 마음에 들어 가끔 간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카페 7373(철썩철썩, 파도소리에서 따온)이었다. 그 집은 브런치가 아주 맛있어서 주말에 남편과 내려와서 느지막이 브런치를 먹고 바다를 거닐다 갔었다.
지난 주말 이마트에 장 보러 왔다, 남편과 카페에 들러 카푸치노를 마셨다. 카페 바깥에 ‘카페 전체 대관 30만 원’이 붙어 있었다.
내가 앞으로 큰 파티를 하면, 여기서 하고 싶다. 가족과 친구들, 서울에 사는 제자들을 불러 몇 시간에 걸쳐 먹고 마시며, 옛이야기들을 나눌 것이다. 정원에 앉아도, 실내에 앉아도 바다가 눈앞에 가득 들어오는 집이다.
나는 주로 이 카페 부근에 차를 대고 먹고 마시고 걷는다.
3. 그랜드 섬오름 호텔
가족이 오면 묵을 수 있게 내가 예약하는 호텔이다.
언젠가 엄마와 동생이 방문했을 때, 맑은 밤 달이 커다랗게 바다에 떠있었다. 달빛을 누리며 둘이 걸었던 그 길을 잊을 수 없다. 보행이 부자연스러운 엄마는 호텔 3층에서 바로 마주 보이던 바다와 범섬 풍경에 종일 창가를 떠나지 않으셨다고 한다.
4. 정작 내가 어제 점심을 먹은 곳은 ‘구럼비나무’
구럼비나무 : 제주 서귀포시 법환로 15
주말 저녁에는 대기해야 해서 갈 수 있는 맛집인데, 어제 점심에는 자리가 있어 신나게 새우 크림 칼조네를 먹고 왔다. 치즈가 듬뿍 들은 음식을 2/3쯤 먹었더니 아무리 걸어도 저녁까지 배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푸짐한 음식을 먹어줘야 한다. 피자와 파스타도 맛있다. 서귀포에는 이렇게 제대로 하는 집이 잘 없어서 우리 집 외식 리스트에 있는 집이다. 다이어트에는 전혀 도움 안 되는 집.
서귀포의 바닷가 횟집들은 추천하기 어렵다. 제주는 괸당 문화가 남은 곳이라, 돼지고깃집이나 횟집은 어디나 맛있다. 바닷가 횟집들은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있어 비싸기만 해서 눈살이 찌푸려진 적이 있다. 도민은 바닷가 횟집에 서울에서 온 손님이 살 때만 간다.
대신 우리는 ‘지인이 하는 집’이나, ‘주인 친구의 지인’ 임을 밝힐 수 있는 집을 간다. 관광객이라면, 올레 시장 안에서도 큰길 쪽이 아니라 골목 안 횟집들에서 더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환포구는 우리 학생들이 여름이면 수영하고, 다이빙하러 가기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지금은 수영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우리 부부와 친구 부부는 술이 한 잔 거나해지면, 법환포구에 갔었다. 마을에 있는 ‘이태리치킨’ 집에 후라이드치킨을 주문하면 주인아주머니가 오토바이를 타고 포구까지 직접 배달해 준다. 치킨을 안주 삼아 넷이 맥주를 마시며 즐겼던 밤들. 우리가 서귀포에 녹아들었던 시간이었다.
막숙포로에는 수많은 밥집과 카페, 선물 가게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가면 된다. 지금 또 호텔을 짓고 있었다. 부디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는 사려 깊은 개발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