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느리게 가고 있다. 서귀포의 가을은 11월에도 뜬금없이 20도를 훌쩍 넘어서 계절을 헷갈리게 한다. 지난 주말에 학생들은 반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왔다. 느린 가을은, 적응되면 더 오래 가을을 즐길 수 있게 한다. 한 달 전 뉴욕의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했는데, 서귀포는 이제 막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바닷가에 내려간다. 서귀포의 가을은 산책이고, 그 산책은 곧 힘이다.
자구리물은 칠십리길 서귀포항 동측 해안가 앞에서 암반 틈새로 솟아나는 산물이다. 옛날부터 물이 풍부해 물허벅을 이용해 식수로 사용했다.
예전에 인근 도축장에서 이 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 잡으러 가자’란 뜻이 와전돼 ‘잡으러’를 ‘자구리’로 불렀다고 하고, 밴댕이 작은 물고기를 경기도 방언으로 자구리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전쟁 또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자구리 해안가로 몰려왔다. 이때 경기도에서 온 이들이 밴댕이 물고기처럼 보이는 자리돔이나 작은 물고기들이 보이는 이곳을 자구리 해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일보]
1945년에 마사코와 결혼 한 이중섭은 1951년에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서귀포로 온다. 그가 가족들과 한 해를 보낸 그 흔적을 서귀포 솔동산 위쪽 이중섭로에서 만난다. 그 시기에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가슴이 울컥해지며 애잔한 마음이 든다. 짧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 그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고기와 게를 잡으러 아이들과 매일 달려 내려갔던 바다가 자구리 해안이다.
서귀포의 해안을 걷다 보면 섬 세 개가 교대로 우리를 따라온다. 나는 오른쪽부터 ‘범문섶’으로 외웠다. 자구리에서는 문섬과 섶섬, 새연교 앞의 작은 새섬이 보인다.
범섬
범섬은 멀리서 바라보면 큰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 같아 호도(虎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2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무인도이다. 해식 쌍굴이 뚫려있는데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울 때 뻗은 두 발이 뚫어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섬 주변에는 기복이 심한 암초가 깔려 있어, 6월부터 7월까지는 감성돔, 뱅어돔, 참돔이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등의 낚시가 가능하다.
문섬
서귀포항의 관문으로 등대가 있는 무인도이다. 옛날부터 모기가 많아 모기문자(蚊)를 써서 문섬이라 불렀다.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하다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리니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흩어져서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범섬이 되었고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문섬에는 난류가 흘러 아열대성 어류들이 서식하며 63종의 각종 희귀 산호들이 자라고 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수중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어, 스쿠버다이빙 명소로도 유명하고,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섬이기도 하다. [Visit Jeju]
나는 오늘 새연교가 있는 새섬에서 자구리해안을 걸어 서복기념관까지 걷는다. 차는 새연교 주차장에 대도 좋고, 서복기념관에 대도 된다. 약 2km의 길. 그 길에서 우리는 이 도시의 예전 모습과 지금 사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관광객을 위한 길은 아니다. 서귀포 시민의 일상을 만나는 길이다. 어쩌면 관광객들은,
“볼 거 없어요. 딱 이 풍경뿐이어요.”
할지도 모르지만, 구도심에 사는 우리에게는 곳곳이 맛집이고, 달빛 고운 밤 아이들을 데리고 부른 배가 꺼지게 달려 보는 길이기도 하다.
곳곳에 내 서귀포살이의 추억이 있다.
바람 부는 날 새연교에서 몸이 휘청거려 노래 부르며 내려왔던 기억,
여름이면 새연교 아래 난간에서 노천음악회가 열려 주말마다 남편과 갔던 기억,
블루베리 농장을 가진 땡큐베리 카페에서 블루베리를 주문했던 기억,
몬스테라에서 베트남 연유커피, 카페 쓰어다를 마시며 베트남을 떠올렸던 기억,
가까운 절을 찾던 시절 들렀던 인근 절에서 사자개 차우차우를 만나고 겁에 질렸던 기억,
꽤 오래전 자구리 해안에서 벌어졌던 국제 퍼포먼스 페스티벌을 구경했던 기억,
지난여름, 내 생일날 아이들과 자구리공원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선 채 먹었던 기억들.
그래서, 자구리에는 아는 맛집, 가본 맛집이 많다.
1. 대도식당
김치복국이 일품이다. 하루 종일 영업하는 집이 아니다. 오후에 재료 떨어지면 문 닫기도 한다. 해운대에서 맛을 익힌 복국은 여기서도 가끔 생각나게 한다. 남편과 친구들이 불금을 보내고 나면, 토요일 점심은 여기 모여 해장하기도 했다.
2. 로쿠베 스시
우리의 오랜 단골집이다. 주인과도 친해지고, 그의 아내인 일본인과도 알게 되어 이전 중앙로터리에 있을 때부터 일 년에 서너 번씩은 꼭 갔다. 우리는 메뉴를 정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오마카세’ 해서 주인 추천에 따라먹는다. 언제 가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집이다.
3. 카페 땡큐베리
나는 블루베리를 아침에 먹는다. 블루베리를 한 20~30알 정도 아침에 먹지 않으면 허전하다. 여기 와서 생긴 호사스러운 습관이다. 블루베리 철이 되면 농장에 가서 몇 킬로 사다가 냉동실에 넣어둔다. 여러 농장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여기를 알았고, 일 년 치는 실은 다른 농장에서 산다. 주인 부부가 너무 선하고, 순해서 도저히 사지 않을 수 없는 집이다. 하지만 봄에 블루베리가 다 떨어지면 일찍 나오는 땡큐베리에서 일 킬로씩 사다 먹기도 한다.
카페에서 블루베리 스무디를 먹어보았는데 내 입엔 너무 달아, 얼음을 좀 넣었으면 싶었다. 그래도 노천에 자리도 있고, 이층에서는 자구리 풍경이 다 들어오니 추천하는 집이다.
4. 삼보식당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집이라 자주 가지는 않는다. 살다가 힘이 너무 떨어질 때 혼자 맛난 것을 먹고 다시 살아나고 싶을 때, 이 집에 가서 고등어구이를 시켜 먹는다. 그 흔한 고등어구이가 눈이 번쩍 뜨이는 맛으로 살아났고, 한 마리는 다 못 먹어도 천천히 식사를 즐기고 나면 힘이 솟아났다. 배부른 놈에게 우울은 없었다.
5. 나운터 횟집
“자구리 맛집들을 추천해 주세요!”
내 학생들 엄마 단톡방에 부탁드렸더니 속속 정보가 넘치도록 들어왔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오래 산 토박이들의 입맛이라 믿을 만할 것이다.
“부채새우 나오는 시기(지금부터 겨울 끝까지)에 가보세요.”
나운터 횟집은 고가의 으리으리한 횟집보다는 조금 싸고, 시장보다는 비싼 중간 정도 선택이 될 것이다. 나도 곧 부채새우를 먹으러 가보려 한다.
제주도 횟집에서 내가 아쉬운 것은 매운탕이다. 나는 부산에서 자라 입맛이 부산 여자라, 고추장도 싫고, 고춧가루를 넣은 칼칼하게 매운 생선 매운탕을 좋아한다. 제주도의 매운탕은 된장 베이스이다. 자리물회의 된장 베이스 깊은 맛은 무척 좋아하는데, 매운탕의 된장은 끝까지 어색했다.
서귀포시에서 내가 가장 많이 걸은 동네. 뒷골목 하나하나까지 거의 다 가본 동네. 자구리에 대해선 할 말이 넘친다. 그래서 제목도 걷다가 만난 동네의 담에서 가져왔다.
지금 기온. 서울 2.7도, 서귀포 15.3도.
길고 느린 가을. 내가 서귀포에 사는 이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