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자화상>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나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들이 마시는 순수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세상에는 밝은 사람과 어두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상황과 삶에 따라 그 면이 더 혹은 덜 발현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이 이분법적으로 어둡고 슬픈 천성의 사람들이 있다. 천성이 먼저였을까. 병이 먼저였을까. 나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내가 본 세상은 절망스럽고 허무한 것이었어요. 절망의 끝, 허무의 끝, 죽음의 끝까지 가봤던 셈이지요. 그 끝은 삶의 긍정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최승자와 최보식의 인터뷰 중)
나는 누구인가. 나는 뱀이다. 어둡고 슬픈 존재. 내 혀끝은 갈라지고, 나는 사악하고 나쁜 꿈을 꾸면서 이 슬픔의 독이 발효하기를 기다린다.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의 상징인 뱀의 슬픈 운명처럼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고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기어다니는 운명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식의 불행 때문에 일상적인 행복과는 상관 없이 태어난 자아 속에서 <슬픔의 毒>이 발효 되기를 기다리는데, 바로 그 과정이 詩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치수
한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김영하의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매일 나는 나를 파괴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매일 매일의 투쟁이다.
아침에 혼자 있는 시간 나는 나를 살리다가, 낮에 사람을 만나며 상처받고, 나를 파괴한다. 저녁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내가 택한 삶의 방식이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
절망과 허무 끝에 얻은 긍정이다. 희한하게 낙관적인 태도이지만, 이만큼도 쉽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