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숙 씨는 내 평생 친구 중 한 명이다. 내가 50세 이후 해외 유학과 어학연수를 쓰고 있다고,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경험담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깊은 감사드린다.
2020년 1월 나는 상해외국어대학으로 짧은 단기연수를 떠났다. 가는 날 오는 날 다 합해 25일 남짓, 1월 말에 춘절이 있어 그해는 3주 남짓밖에 연수가 진행되지 않았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단기 연수였다.
매일 일수 도장 찍듯 반복되는 일상, 다른 사람들은 60세가 되면 기념비적인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는데, 뭘 하고 싶으냐 딸이 물었을 때 나는 말했다.
“꼭 하고 싶은 게 있어. 낯선 도시에 가서 학생으로 학교 다니고, 수업 끝나면 주변을 걸어 다니고 학생 식당, 주변 식당에서 밥과 차를 사 먹을 거야. 네가 취업하면 나한테 그 시간을 주겠니?”
딸은 그러겠노라 약속해 주었다.
나는 중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이얼싼쓰, 니하오 정도, 주워들은 풍월에 불과한 중국어지만 어떻게 아주 쌩초보의 기초입문반에 들면 어거지로라도 따라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사실(그래도 간자체는 낯설었다만), 지리적 시간적으로 영어권 지역보다 가깝기도 하고 비용 또한 충분한 가성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단기 연수를 찾아보고 신청하려 하자 벽에 부딪혔다. 6개월이나 1년이나 2년 정도의 연수는 더 선택의 폭이 클 테지만, 한 달 남짓 짧은 단기 연수는 나이 제한이 있었다. 만 58세였나? 상해대, 화동대, 상해교통대는 그래서 갈 수 없었다. 찾고 또 찾은 끝에 다행히 상해외대가 만 59세, 천만다행으로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달려가서 마지막 꼬리 칸에 탑승한 기분이 이럴까, 나는 결정되자마자 바로 준비했다. 준비라고 해 봤자 유학원 담당자가 일러준 서류를 준비해 팩스로 보내는 게 전부. 그 과정을 준비하며 가장 놀랐던 건 대학 졸업증명서를 첨부해야 해서 모교에 언제 가나, 했는데 가까운 주민센터에서 졸업한 지 이미 오래인 대학 졸업증명서를 받아볼 수 있다는 대한민국의 놀라운 행정 시스템은 감격스러웠다.
콩 볶듯 후다닥 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전의 마지막 점검이 필요했다.
나는 거실과 주방, 잘 보이는 곳에 다음과 같은 메모지를 붙여 두었다.
분리수거는 화요일
세탁기문 닫아두기 (창문)
영하 7도 이상 되는 날 세탁실 아래 수도 똑똑 물 흐르게 (냉파 방지!!!)
밤 10시 이후 세탁기 사용 금지
안방 전기요-벽 쪽으로 돌려놓기 (-문 쪽은 고온)
끄는 거 반드시 확인, 전기 코드 확인
혹시라도 붙여둔 메모지가 떨어질까 다시 살핀 다음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나섰다. 드디어, 혹은 이제야,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2. 상해외국어대, 영빈관, 루신공원
상해외국어대학교는 워낙 외국어교육으로 유명한 곳이라 했다. 캠퍼스는 홍커우 캠퍼스와 쑹장 캠퍼스 두 곳이라는데 연수프로그램은 모두 홍커우 캠퍼스에서 진행되었다.
도착하자마자 학생증을 받고 모든 등록을 마치고 내가 신청한 기숙사 영빈관 1인실 1401에 짐을 풀었다. 호텔식인 영빈관 1인실은 만족스러웠고 창을 열면 캠퍼스 풍경과 멀리 동방명주도 보였다. 상해 전철이 오가는 것도 보이고 홍커우 스타디움도 보이는 멋진 뷰를 누릴 수 있었다. 해 질 녘, 석양이 지면서 전철이 지나는 순간,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수업은 아침 8시 10분부터 1교시가 시작해 4시간 이어졌다. 월화수목금토, 나는 거의 매일 조금 일찍 일어나 학교 정문을 나가 길을 건너 루신공원(옛 이름 홍커우공원)으로 갔다. 상해외대 정문을 건너면 바로 루신공원 북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공원에는 윤봉길의사의 기념관이 있고 (1932년 윤봉길의사가 일왕의 생일이자 전승기념일에 폭탄을 던진 의거를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국의 작가 루신의 묘지와 기념관도 있다. 루신공원 북문으로 들어가 윤봉길의사 기념관 쪽을 걸어서 루신의 묘지를 돌아 나와도 이른 시간, 출근길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음악을 틀고 광장무를 추고 새 조롱을 들고 함께 산책하고 피리를 불거나 태극권 같은 체력단련을 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때로는 광장무를 추는 상해 마마들 틈에 섞여도 보다가 또우장과 사과 한 알, 그리고 쩬삥(중국빵)이나 삶은 달걀을 사서 아침을 먹고 수업하러 가곤 했다.
20명 정도가 한 반인 교실은 대학생인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젊은 그들과 수업하면서 교실에서 세탁실에서 학생 식당에서 마주치는 일은 즐거웠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나와 같은 연배인 ㅇ선배, 그녀는 딸이 상해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어 중국어를 공부하려고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학교 안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나와 달리 딸네 집에서 매일 등하교를 하고 있었는데, 기숙사는 생각도 못 했다며 기숙사생인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워낙 쌩 기초 기본 입문반이라 매일 4시간의 수업은 힘들지 않았다. 주 2, 3회는 오후에도 영화 관람이나 중국문화 체험, 관광 등 프로그램이 나름 알찼다. 오후 프로그램이 없는 날이면 매일 쯔펑루 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고 상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덕지덕지 살아오며 붙은 비틀린 자의식, 살기 위해 몇 개로 번갈아 써야 하는 페르소나들, 거짓 웃음과 역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는 그곳 상해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했다. 혼자 걷고 먹고 마시고 보는 그날들이 얼마나 온전한 나의 날들이었나. 지금 돌아봐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가 언제나 아쉽다.)
단기 연수 프로그램이 끝나고 테스트도 나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고(문법, 쓰기, 읽기 91점/ 회화 96점) 수료증도 받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제 여유롭게 2주 정도 기숙사를 누리며 놀다가 돌아가겠다던 계획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수료식 2일 전부터 상해 시내 마스크가 동이 나더니 상해시 안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상해와 코로나가 시작된 후베이 우한은 상해에서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리고 후베이가 봉쇄되었다.
어떡하지? 아침마다 들러 커피와 또우장을 사던 학교 카페테리아의 동갑 친구 주리도 문을 닫고 떠났다. 상해 전체가 우울하게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쉬움 때문에 이틀을 더 머물다 결국 춘절 전날, 난리북새통인 푸동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울로 왔다. 벌써 4년 전의 일이 되었다.
2024년 4월 7일 강민숙 씀
http://www.oisa.shisu.edu.cn/index.php/en/index/lxxm/cid/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