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지영어 선생님입니다.
많은 제자 중에서 첫 손꼽을 수 있는 제자는 사이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조그만 몸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가 왔다. 공부를 잘해서 힘든 아이였다. 여러 군데 다니던 학원에 지쳐 내 눈앞에서 잠들면, 조용히 기다려 주기도 했다. 자기가 받는 교육이 힘들어 어릴 적엔 울기도 했지만, 부모의 의지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였다. 영어는 특히 잘해서 어릴 때부터 다른 학생들의 경외와 질투를 받았다.
그렇게 우수한 아이를 만나면 굳이 실력을 높이려 애쓰는 선생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바탕을 잘 받아주고, 이끌어 주기만 해도 저절로 제 길을 찾아 나간다. 지금도 나는 그런 자세이다.
아이는 당연히 외고에 갔고, 그즈음엔 그 학교 전문 학원으로 옮겨서 대입을 치렀는데 떨어졌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그에게 쓴 편지이다.
요즘 네 생각 많이 한다.
아마도 네 카톡 프로필의 'Nothing'이란 말에 마음이 아려 그런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영어 듣기 따위 준비 안 해도 될 만큼 잘했던 너. 그런 네가 수능 듣기 시간에 마침 어지럼증이 왔고, 결국 영어 백 점을 맞지 않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시에 불리한 외고라도 시험에 떨어지리라곤 네 부모님도, 나도, 그리고 당사자인 너도 상상하지 못했다.
너는 아마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너는 아마 부당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너는 충분히 노력했고, 그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억울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이 결과는 잘못된 교육제도 탓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Simon.
그것이 인생이란다.
넌 이제 그 출발에 홀로 선 것이고.
나는 삶의 시련에는 그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은 마치 끝처럼 느껴지더라도 이것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중에 그 시련은 전환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찬찬히 자신을 돌아보렴.
혹시 내가 교만했던 것은 아닌가.
하루 동안 침묵한 후에 네가 한 말은 "죄송합니다" 였어.
부모님께, 그리고 선생님들께 네가 죄송해할 것은 없다.
지금은 뒤돌아보지 말고 다음에 어디로 발을 뗄지 그것만 생각하는 거다.
네가 정시로 좋은 대학에 가건, 아니면 2차 학교를 택하건, 그도 아니면 재수하건, 그건 전적으로 네 선택이어야 한다.
이제 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니까.
너는 영리하고 주관이 뚜렷한 남자이니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고 기다릴게.
모든 일이 정리되거든 바람도 쐴 겸 훌쩍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오렴. 먹여주고 재워줄게. 사랑한다, 나의 제자야.
- 너랑 십 년을 같이 했던 선생님이
다음 해 사이먼은 다시 수능을 쳐서, 내가 본 적 없는 성적표를 보내왔다.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며 제자들에게 “이런 성적표도 있을 수 있다!” 하며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경영대학에 진학했다.
지금 사이먼은 대학생 창업을 했다. 그의 일에 대해 적어달라는 요청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 회사 이름은 R2C 컴퍼니이고, '픽플리'라는 플랫폼 서비스를 운영 및 개발하고 있습니다.
픽플리는 데이터와 트래픽이 필요한 고객과 데이터/트래픽을 제공하고 소정의 보상을 받는 유저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입니다.
더 간단하게 예시로 설명해 드리면,
- 학업과 취업을 위해 설문조사가 필요한 대학생
- 논문과 연구를 위해 설문조사 또는 실험 참여자가 필요한 대학원생
- 사업을 위해 각종 데이터와 참여자가 필요한 기업
등 각자의 업(業)을 위해 데이터가 필요한 사람들과 일반 대중분들을 연결해 주는 사업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점은 단순히 성적이 좋고, 우수해서만이 아니다.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은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는 감이 드는 사람이 몇 있었다.
그것은 성실성이기도 했고, 예술적 감각이기도 했고, 탁월한 지능이기도 했다. 간혹 대화조차 따라잡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들이 노력과 영리함으로 사회에 차츰 발자취를 남기는 것을 보았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고 세상이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범인이고, 그들은 비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씨앗을 어린 사이먼에게서 보았다.
그는 스승의 날이나, 명절이 되면 내게 잊지 않고 꼬박 인사를 건네고, 제주도에 올 때마다 나를 찾아주고,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해 주었다. 그 다정함에 감탄한다.
사실 지난 시절의 단과 과목 학원 선생이야, 스쳐 지나가면 그뿐인데. 많은 아이를 그렇게 보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내 곁에 남았다. 그들이야말로 내 일의 가치를 높여준 사람이다.
곁에 남은 몇 명의 제자로 인해 나는 지난 22년의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고맙다. 얘들아.
딸의 결혼식에 제주도에 온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중에 내 칠순 잔치할 때 다시 서귀포에 모이자. 그때는 모두 짝을 만나서, 가족이 함께 와다오.”
그날까지 아이들이나 나나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그래서 모두 신나는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