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동안 글을 썼다고 하면,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작가세요?” 그러면 나는 애매한 웃음을 흘리고, 말을 좀 더듬는다.
“그, 그게, 아직.”
76학번으로 대학 가고, 20년 후 96학번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시집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에 솥밥만 세 번 이상 했던 ‘정지 가시나’가 논문을 쓰기 위해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손발이 짓이겨지도록 종일 물만 만지던 손이 노트와 키보드를 잡았다. 노트가 내 정신을 붙잡았고, 키보드가 힘을 실어 달리게 했다. 그리고 내 세계가 달라졌다.
하이텔의 ‘세계로 가는 기차’라는 여행 동아리에 우리 가족의 독일생활기 <오렌지와 아우토반>을 연재했다. 나와 띠동갑인 젊은이들이 열렬히 환호해 주었다. 그 첫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글을 쓰니, 다른 사람이 그 글을 읽고 좋아한다?
그때는 디스켓에 문서를 저장하던 때였다. 디스켓 15개인가를 문서로만 꽉꽉 채울 만큼 미친 듯이 글을 썼다. 여행기도 쓰고, 시집살이 한풀이도 했다. 아이들 이야기는 적당하게 나를 드러내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많이 젊은이들이 연애상담을 했다. 그들의 편지에 언니, 누나처럼 답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요즘 젊은이들보다 더 솔직하게 좋아했고,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밥밖에 몰랐던 허술한 아줌마는 차츰 사회화가 되었다.
“꼬낀느는 글로 생활과 균형을 맞추는 거야.”
하이텔, 천리안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서며 인터넷이 시작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모임과 게시판이 생겼다. 동호회도 생겼고, 동창회도 생겼고, 친목 모임도 많았다. 쉽게 없어지는 모임도 있었고, 다시 만난 동창들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모임들도 있었다.
인터넷 초창기에 혼자 낯 뜨거워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글을 올리고 난 후 가장 큰 애독자는 나이다. 나는 자주 내 글을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고 고치곤 한다. 어느 날 글 목록을 보니, 내 글만 색이 달라져 있었다.
‘어머나, 쑥스럽게 왜 내 글 제목만 색을 달리했을까.’
그러면서 은근히 좋아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 번 클릭한 글은 제목의 색이 달라지게 만든 인터넷의 묘수였다. 그렇게 인터넷을 배워가며 다양한 게시판에서 계속 글을 썼다.
지난 10년간 아픈 사람과 보호자들을 위한 글을 썼다. 남은 생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이나 나에 대한 잡글들은 이기적으로 느껴져 역겨웠다. 자신을 벗어나 타인의 이익을 위하는 게 올바른 삶이라 믿었다.
그러다 작년부터 다시 내 글로 돌아왔다. 내가 늙는구나, 싶으니 죽는 순간 살아온 시간의 장면이 모두 떠오르듯 내 시간들이 돌아봐졌다. 그걸 붙잡고 남기고 싶었다.
나는 왜 지치지도 않고 글을 쓸까. 여행을 다니며 눈과 마음에 새로움이 가득할 때는 그 이야기를 풀고 싶었고, 딱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는 죽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며 살아났다. 글을 쓰면 울적하지 않았다. 간혹 읽는 이가 내 글에 따뜻한 공감을 보내주면 혼자 싱긋 웃었다. 한때는 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고, 한때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 속에서 이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워낙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혼자 글쓰기에는 큰 맹점이 있었다. 제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글쓰기가 배워서 느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대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선 제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어야 했다. 눈 밝은 선생이나 동료의 글에 대한 객관적 지적이 필요했다.
작년에는 혼자 글쓰기의 답답함이 극에 달한 한 해였다. 그래서 여기저기 글 쓰는 모임들을 기웃거렸다. 선생이나 동료가 있어야 했다.
“당신 글은 이게 잘못되었어!”
하는 바른 소리를 듣고 싶었다.
김은아 선생이 처음으로 평을 해주었다. 그 지적들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백일 동안 매일 글쓰기 하는 모임도 하고 있다. 27년 동안 초보를 못 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글쓰기를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모른다. 뚜벅뚜벅 혼자 무데포로 쓴다? 매일 꾸준히 쓴다? 여러 사람들에게 글을 보이고, 비판을 듣는다? 답답해서 올해의 수필 책도 보고, 상 받은 수필 작품들도 봤다.
‘아하, 내 글은 수필이 아니구나.’
나는 그저 오늘의 감상을 블로그에 올리는 블로거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일어나는 사실의 나열과 혼자 반성하는 일기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써야 했다.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내 글이 인류에게 읽을거리로 남지 않더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도움이 될 날을 기다리며 쓴다.
이 나이 되기까지 글로 이룬 게 없다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깨끗하게 접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절대 접을 수 없는 나의 과제가 있다. 그래서 글 쓰는 솜씨를 늘려가고, 더 치밀하게 구성하고, 독자를 설득해야 했다. 쪽 팔리고, 또 좌절해도 그만둘 수 없었다. 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기에 오늘도 나는 쓴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맺음말)
첫 글을 본 대학 동창 정애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보통의 신노년이 아니야. 특별한 노년이야.”
맵게 바른 말 잘하던 친구라 순간 긴장했다.
“넌 가진 게 많아. 연금만 해도 그렇잖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지는 친구의 말을 들었다.
나는 인생은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집과 연금을 가졌지만, 지금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수 있는 아픔도 있다.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글을 쓸 것이다. 나의 한숨과 남의 아픔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