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이 밥 먹여주긴 했는데

뉴욕 한 달 살기 5

by 꼬낀느



시차는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첫날과 이튿날은 잘 넘겼는데, 삼일째 새벽 두 시 반에 깨서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주말이라 줌 수업도 하고, 동생이랑 브루클린에 산책 가서, 동생 친구와 만나 셋이 걸었다. 두 사람은 93년도에 여기 와서 30년째 살고 있다.

“한국에선 셋이 모이면 연장자가 밥 사는 거니, 점심은 내가 살게.”

외식비 비싼 뉴욕이지만, 기꺼이 동생들을 위해 자청해서 밥 샀다.

식당을 나와서 다시 걷는데, 저 건너편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야, 왜 저 사람들이 우리를 우러러보고 있냐?”

“언니, 뒤돌아봐.”

아, 거기에 우리가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영화에서 봤던 그 맨해튼 다리가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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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6일 내 사진과 영화 포스터



대학 졸업 후 유학 와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영민의 친구들은 한국에 돌아간 이들도 있고, 여기서 결혼하고, 집 사고, 일자리 있다 보니 이제 노후까지 보내게 된 사람도 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인 사람도 있고, 결혼하고 자녀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대단들 하다. 나 같으면 혼자 이렇게 오래 외국에서 못 살았을 건데.”

집 있고, 남편 있고, 자식 있어도 외로운데, 해외에서 독신으로 나이 먹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유학하고, 외국에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하여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한국의 대표적 기업에서 임원직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 살건 외국에 살건 그 자리에 존재한다고 더 행복해지진 않는다.

자식도 그렇다. 나는 이제 자식이 있어 더 행복하고, 없어서 불행한 시대는 지났다고 믿는다. 삶의 기준 잣대가 행복이라도 말이다.

또 유학 갔다 잘못된 애들을 보기도 했다. 사실 유학은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다. 적응 과정에서, 혹은 외로움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간 여자도 있었고, 우울증 이상의 병을 얻은 이도 있었다. 학업 마치고 귀국해서 안정적인 자리로 돌아온 사람도 있고, 못 온 사람도 있다. 결론적으로 멘털이 강한 사람이라야 유학의 충격이 덜하다. 막말로 공부하러 갔다가 피폐해져 돌아와서야 되겠나.


동생의 아파트는 침실 하나에 너른 거실이 있는 집이다. 거실이 넓고, 입구 쪽에 방처럼 가려진 공간이 있어서 거기가 손님방이 되고, 나는 거기 머문다. 원래 센트럴 파크 부근의 집값은 ‘베드룸 하나에 원 밀리언 달러’란 말이 있었다. 침실 둘이면 26억이 넘는다. 이제 서울 아파트값도 하도 비싸져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나? 그래도 이 아파트에 혼자 사는 한국 여자애를 보고 놀랐다. 능력 있는 여자도 많다.

내 주위에서 유학 간 사람들은 모두 중산층 가정이었다. 유학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보낼 만큼 큰 부자인 사람은 없었다. 우리 아버지만 해도 사업이 한창 잘 되었을 때라 딸들을 유학 보냈었고, 나도 남편도 힘껏 벌어서 자식들 유학을 보냈었다.


부모들이 큰 경제적 부담을 안아가며 유학을 보내지만, 그게 반드시 빛나는 미래를 장담하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은 어디서나 제 근성대로 살기 마련이니까. 공부 잘할 놈은 한국에 있으나 유학을 가나 잘한다. 통계를 보니, 10년 전보다 유학생이 반으로 줄었다. 코로나 이후에도 선뜻 회복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져서가 아닐까.


you.jpg http://www.koreatimes.com/article/1416756


나와 보니,

“코리아면 남이냐? 북이냐?”

묻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우리나라의 힘이 커졌다. 그리고 예전에는 공부 잘하면 유학을 꿈꾸었는데, 이제는 학생들 분위기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30년 전 뉴욕에 유학온 두 유학생과 식사하면서, 유학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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