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 달 살기 11
내가 없는 동안 집에 국거리는 한 끼 분량으로 냉동실에 넣어 두었고, 서귀포의 셰프가 하는 반찬가게에서 일주일에 두 번 반찬을 배달시켰다. 남편과 재택근무하는 딸이 먹기엔 모자랐지만, 남편이 또 요리를 잘하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단 추석 주간에는 배달 음식이 오지 않아 내 어릴 적 친구에게 반찬 몇 가지만 해서 남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애월에는 내 친구 부부가 산다. 미화는 국민학교 5학년 때 단짝 친구였고, 그녀의 남편은 나와 같은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나왔다. 미화는 경남여고에 합격했는데, 나는 떨어지고 2차 학교를 갔다. 마흔 살 안 되었던 젊은 울 엄마, 미화 오면 질투 나 괜히 심술도 부리곤 했다.
살아오는 구비 구비에 연락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면서, 이제 같이 제주도에서 나나 내 친구나 부부 둘만 남은 집이 되었다. 조수리의 미경 부부, 애월의 미화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 여섯 명은 두 달에 한 번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에서 만남을 갖는다. 사실 제주에서의 삶은 이런 부부 모임이 꼭 있어야 늙어가면서 덜 외롭다. 모두 주택과 정원이 있는 집에 살고, 서울에서 일하다 왔다는 공통점이 있어 대화가 재미있다. 전문적인 농부처럼 땅과 나무를 가꾸지는 못하니, 서로의 실수담과 실패담을 나누며 웃곤 했다.
반찬 부탁을 했다 하니, 남편이 그렇게 폐 끼칠 것까진 없다고 했지만, 뭐 친구라는 게 이럴 때 서로 도와주면 좋지 않냐고, 더구나 미화가 손 솜씨가 좋으니 덕 좀 보자고 내가 나서서 부탁했다.
오늘 잠에서 깨니 미화의 남편이 음식 사진을 찍어 보내서 정말 놀랐다. 마치 잔칫상처럼 어마어마한 음식들이 비린 것 싫어하고 고기와 채소를 좋아하는 남편 식성에 맞추어 준비되어 있었다.
내 동생들 카톡에 공유하니,
“입이 쩍 벌어지네, 그 정성 생각하니.”
“한정식집 해도 되겠다.”
하며 모두 감탄한다.
“그러게. 나는 복도 많지. 무슨 선물 사가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다.”
아무리 일 잘하고, 큰일 탁탁 쳐내던 여자라도 우리 나이쯤 되면 일이 좀 두려워진다. 체력도 떨어지고, 평생 일할만큼 해서 그만하고 싶다고 할까. 잘 아는데, 미화가 나선 것이다.
다시 한번 음식 사진을 본다.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들고 싶을 만큼 맛갈진 음식들이다. 그리고 그 솜씨 알기에 더 군침 돈다.
친구의 노고에 답하려면, 올겨울에 바를 톡톡한 영양크림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노고에 어떻게 내 감사를 전할 수 있을 것인지 남은 시간 동안 생각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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