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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Oct 14. 2020

[수플레] 혹시 푸른 밤이 필요하세요

ep.33 성시경 - 제주도의 푸른 밤


여러 버전이 있지만 여전히 성시경 버전이 최고




모두에게 여행이 간절한 요즘이지만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입사한 지 6개월 차, 이제 업무가 손에 익어가는데 능률은 제자리를 맴도는 시점. 실적은 오를 기미가 없고 의욕은 희미해진 지금. 여름휴가며 추석 연휴며 달콤한 휴식은 다 끝나고 이제 내년 구정까지 또 쉼 없이 달릴 일만 남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는 쉬는 날에도 아무도 만나기 싫고 침대에 퍼져 있고만 싶다. 운동이나 하면서 간간히 땀이나 뺄 뿐 새로운 무언가를 도모할 에너지 자체가 없는 느낌이다. 이런 기분 처음이야.


직장에선 매일 기를 빨린다. 항상 만나는 환자들은 오랫동안 낫지 않아 고생하는 이들이고, 새로 만나는 환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여기저기 새롭게 아픈 이들이다. 완고한 통증,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통증, 생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어찌할 수 없는 통증, 통증, 통증... 매일을 통증의 밭에 있다 보니까 이젠 내가 다 아픈 느낌이다. 이런 고민을 다른 회사원 친구들한테 얘기할 수도 없다. 일반 회사라면 복사만 주구장창 하고 있을 6개월 짬밥이 별 신박한 투정을 부리네, 한다. (실제로 들은 말)



2015년, 제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귓가에 '떠나요~ 둘이서~'로 시작하는 잔잔한 노래가 맴돈다. 정신 차려, 살기 바쁜데 제주도는 무슨 제주도야, 하다가도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하는 가사가 이어지면 이내 몽상에 빠지기 시작한다. 파란 밤이 손에 잡힐 듯하고 찬란한 별들이 쏟아지는 제주. 그 풍광이 눈가에 아른거리기를 몇 달째, 결국 결심했다. 그래, 까짓 거 가자. 이왕 갈 거 몇 박으로 아쉽게 끝내지 말고 아예 두 달은 살고 오자. 복무만료 후의 미국 여행도 이미 포기하지 않았던가. 일 년을 열심히 했는데(할 건데) 두 달 정도는 괜찮다. 이름하야 '푸른 밤 프로젝트'.


계획은 이렇다. 현재 직장과 계약이 끝나는 내년 5월, 퇴직금과 비상금을 몽땅 털어서 고오급 독채 타운하우스를 혼자 빌릴 것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가 있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마당이 있고 숲길 러닝 코스가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공간. 자동차도 탁송을 보내고 주방도구도 한가득 챙겨 가서 아예 살림을 차릴 예정이다. 제철 채소로 음식도 만들어 먹고, 서핑도 하고, 오름도 오르고, 글도 많이 많이 써야지. 지금은 이렇게 마감에 치여서 쩔쩔매고 있지만, 거기에서는 다를 것이다. 반드시 달라야 한다..

2017년, 제주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고독이지만 또 그렇다고 고독만 있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고독과 외로움이 오래 묵게 되면 반드시 후회나 본전 생각이 나기 마련인데, 그건 여행지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래서 사람이 꼭 필요하다. 주말마다 친구들을 불러서 소소하게 파티를 열거나 제주도에 살고 있는 선후배들을 꼬셔서 놀 계획이다. 그리고 그곳엔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떠나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이웃들과 친구가 되어 살아온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아예 효리네 민박 컨셉으로 숙박객을 받을까 싶기도 하다. (내년에 놀러 오실 분 구함)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제주도는 왠지 모르는 사람과도 터놓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무장해제가 가능한 섬이니까.


아마도 그건 제주도라는 섬이 주는 단절감 때문일 테다. 노래의 말마따나 '모든 것 훌훌 버리고 떠나는' 느낌이 물씬 드는, 지금의 삶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공간.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막힌 탓에 숙박비 인플레이션도 심하고 관광객도 넘쳐날 테지만 아무래도 좋다. 일상을 탈피할 수만 있다면! 지금부터 제주도에서 도전할 항목 리스트를 꾸려야겠다. 그렇게 하나둘씩 목록을 만들어나가는 낙에 기대어 또 몇 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제주




현생을 내팽개치고 제주도에서 두 달을 살고 오면 뭐가 크게 달라질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본다. 육 년 전 한 달여의 유럽 여행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나에겐)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같은 건 여행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게다가 흥청망청 지내는 일은 강화도 생활 3년으로 지겹게 했다. 그럼 왜 가냐고? 남들은 다 열심히 커리어를 착착 쌓아가는데 너는 뭘 믿고 혼자 유유자적할 궁리나 하냐고? 핑계야 대자면 많지만, 최근에 가장 그럴듯한 썰을 들어서 소개한다. 카카오TV의 <톡이나 할까>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인데, 산책과 여행이 뇌에 큰 자극을 준다고 한다. 뇌의 활동은 장소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장소에 갈 때 뇌가 크게 활성화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요즘 같이 일상 속에서만 맴돌게 되면 뇌가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에겐 떠나야 한다.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뇌를 위해서. 꼭 제주가 아니어도 괜찮다. 강원도의 두메산골도 좋고 남해의 푸른 바다도 좋고 각자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각자의 '푸른 밤'이 있는 곳이라면.


(2020.10.14)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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