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re Mar 21. 2022

한의사가 무슨 스타트업이야?


전통의 상징 한의사와 혁신의 상징 스타트업, 이토록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그러나 혁신은 가장 전통적인 분야일수록 필연적이고 가끔은 가장 안 어울리는 조합에서 '유레카'가 쏟아지는 법. 그래서 내가 한다, 그런 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니긴 했는데 새로운 업계로 가는 게 몸도 마음도 부담이 많이 되었던지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지금은 회복 완료!)


정식 출근을 앞두고 몇 가지 짤막하게 기록해두려고 한다. (나중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1. 왜 진료실을 벗어나려고 하는가?


나는 업무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싶었다.


(환자들은 잘 모르지만) 진료는 생각보다 의사의 통제력 밖에 있는 일이다.


1) 우선 이 문제가 어떻게 발생했고 왜 악화되었는지 파악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 논문이나 교과서에는 진단 기준과 치료 기준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실전에서는 경계에 애매하게 걸쳐진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의 사람은 (실험실과는 다르게) 매우 다양한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나의 치료적 개입은, 슬프게도, 아주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2) 내가 아무리 치료를 잘하는 의사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환자의 직업적 환경이나 생활 습관이 고쳐지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만성 질환이 여기에 해당한다.) 늘 똑같은 증상으로 되돌아오는 환자들을 볼 때면.. 커다란 무력감을 느낀다.


3) 그마저도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요즘같이 대안이 차고 넘치는 시대엔 진정한 의미의 통제권은 환자에게 있다. 장기적으로는 더욱 좋은 치료법일지라도, 당장의 빠른 효과를 원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의사로서는 강요할 방법도 없다. 참 씁쓸한 경우다.


나는 성장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성 질환) 진료'는 매우 불연속적인―언제 종결될지도 모르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는―프로젝트가 산재되어 있는 꼴이다. 매일마다 새로운 problem list(환자)를 접하고 solution(치료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것이 내 손 안에서 완전히 종결되어 피드백까지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많은 환자를 보고 열심히 일해도 손에 남는 것은 늘 적다.



이런 느낌은 기대도 안 함

2. 왜 스타트업인가?


우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의사라는 평생의 전공 이외에도 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즉 직업인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진료가 아닌 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기쁘다.) 중요한 건 입사가 아니라 회사에서 당장 성과를 내는 것이겠지만.


치열하게 일하고 투명하게 소통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문화와 사람은 공생 관계이다. 문화는 특정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관과 좋아하는 것을 토대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강화한다.

레이 달리오의 저서 <원칙 Principles>을 보고 그가 운영하는 기업 '브리지워터'의 업무 방식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극단적으로 솔직하고, 극단적으로 투명하게 소통하는 업무 환경에서 일해보면 어떨까, 가슴이 두근댔다.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이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스타트업 특유의 치열한 분위기와 업무 환경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일해보고 싶었다. 


확실히 내가 속한 업계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비해 적응이 더디다. 나는 업계의 그저 그런 구성원 중 하나가 아닌, 피 튀기는 최전방에서 혁신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업계 전반, 사회 전반에까지 나의 영향력이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남들이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 앞에서 늘 열의가 불타오르는 편이었다.




3. 걱정되는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는 환경이 처음이라 두렵다.

"상사가 곧 회사다"라는 미생의 명언이 떠오르는 대목. 스타트업 특성상 한 사람의 상사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 '사람 스트레스가 있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회사원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가장 힘든 건 결국 사람과 관련된 일이라는데. 덜덜.


사무실은 처음이라 두렵다.

진짜로 이렇게 해놓고 일하나요..?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재수 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사회에 나와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개인 공간(진료실)이 없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칸막이로 나눠져 있는 사무실 환경은 좀 낯설 것 같다. 특히 공유 오피스 환경은 더더욱 처음이라 설레기도 두렵기도 한다. 어쨌든 업무 중간중간에 딴짓은 절대 못하겠구나 싶다. 아하하.




앞으로 종종 스타트업 일기를 업로드해보겠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출근이네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2022.03.21)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퇴사, 또 다시 면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