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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r 14. 2022

다시 퇴사, 또 다시 면접



요사이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휙휙 변하고 있다. 요즘 글이 뜸해서 소식이 궁금하신 분들은 네이버 블로그로 오시면 됩니다. 매일 짧게나마 포스팅 중.


1. 다시, 퇴사

작년 10월부터 근무를 시작한 병원에서 6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다. 왜냐고? 늘 조금씩 소진된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표 원장님도 인품이 워낙 뛰어나신 분이었고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좋았지만 단 한 가지, 일 자체에서 내가 발전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불만이 쌓이고 쌓여 태도로 표정으로 드러나는 걸 느끼고부터는 무언가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를 위해서도, 직장을 위해서도.


고민 끝에 어렵사리 말씀을 드렸는데 다행히 원장님께서는 이해해주셨고(그동안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고, 이해한다고 얘기해주시는데 눈물..), 후임 선생님께서도 너무 훌륭한 분이 오셔서 마음 편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인수인계 해드리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얻어갔다. 이런 좋은 분들과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다.


그런데 막상 퇴사하는 날이 되니까, 뭔가 패배한 느낌(?)도 들었다. 근무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간다는 것도 괜히 찝찝하고. 마지막 날까지도 활기차게 돌아가는 병원을 보며 '내가 없어도 이 곳은 잘만 돌아가겠지. 내 빈 자리를 기억해주는 사람이나 있을까?' 이런 감성적인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하..




2. 그래도 누군가는 나를 기억한다

도망치듯 퇴사 인사를 사내 메신저에 올리고 병원을 나서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병원 식당의 영양사 선생님께서 퇴사 선물을 챙겨주신 것. 그간 식당에서 인사를 먼저 건네주셔서 감사했다는 말씀과 함께. 나는 그저 밥을 먹을 때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를 습관처럼 외친 것뿐인데. 이런 과분한 챙김을 받아도 될지.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사실 이번 직장은 최대한 조용히 다녔다. 아무와도 길게 말 섞지 않고 내 할 일만 하자는 마인드로 말이다. 그 누구와도 사적으로 대화를 길게 나눠본 적 없다. 평소 무표정한 얼굴을 하면 무섭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아마 다른 직원분들이 나를 좋게 보시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의 좋은 모습을 굳이 찾아서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번에 퇴사하면서도 인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간 더 살갑게 대해드리지 못해, 나가는 길에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 뿐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간 친하게 지내던 환자분들도 나의 퇴사 소식에 많이 아쉬워하셨다. 그동안 덕분에 많이 좋아졌다며, 어딜 가나 잘 되실 거라는 덕담을 많이 들었다. 다른 원장님들보다 내가 해주는 치료가 특별히 좋았다고 언급해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몸을 맡긴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지 아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냉이 손질 해본 사람은 알지만,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아쉬워하신 분은 70대 노부부 환자분이셨다. 늘 무언가 먹을 거리를 챙겨주시곤 하셨는데, 최근에는 봄나물을 캤다며 냉이며 달래며 한 가득을 손질해서 주시기도 했다. 그 날 퇴근 후 바로 끓여먹은 냉이 된장국의 향긋함은 아직도 선명하다. 이처럼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 공감각적으로 기억되는 분들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기어코 두 분이 같이 오셔서 내 전화번호를 받아가셨으니, 앞으로 또 뵐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환자에게 전화번호를 드린 것은 처음이다)




3. 나도 누군가를 기억하게 된다.


함께 일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치료실에서 나를 서포트해주셨던 간호사 선생님. 늘 내가 필요한 걸 한 발 먼저 챙겨주시고, 환자들을 언제나 웃는 낯으로 대하는 모습에서 프로의 향기를 느꼈다. 경력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도 다른 분들에 비해서도 확실히 돋보였다. 내가 당장 개원하는 입장이었으면 바로 모시고 싶을 정도. 아마 그런 프로의 면모는 '배려심'에서 비롯한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입장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배려심 말이다. 기분이 언짢을 때는 나도 모르게 말투에 은근히 짜증이 묻어나오는 나로서는 정말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나오기 전에 한 마디 드리고 나올 걸. 그동안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이었다고, 많이 배웠다고 말이다. 용기가 없어 진심을 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4. 다시, 면접


차기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대책없이 그만두었는데, 다행히 한 곳에서 먼저 면접 제안을 주셔서 퇴사 다음 날 바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병원이 아닌 '스타트업'이라는 점. 사이드 프로젝트며 소모임이며 이런 저런 일을 벌이다가 해당 스타트업의 대표님과 핏을 맞춰본 것이 좋은 기회로까지 이어진 듯하다. (나대길 잘한 걸까)


면접은 타이트하게 진행됐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도 높은 면접의 분위기. (병원 면접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다양한 질문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주로 '메타인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란 자신의 ‘인지활동에 대한 인지’ 즉, 자신의 인지능력에 대해 알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가를 아는 인지능력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다.


스스로의 기획력을 점수로 평가한다면?
스스로의 멘탈을 점수로 평가한다면?


참고로 나는, 기획력에서는 9/10점을 주고 멘탈에 대해서는 6/10점을 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아쉬운 답변이 아니었나 싶다. '본인의 기획력이 왜 9점이나 되는 것 같냐'는 후속 질문에 나는 '좋은 기획은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요컨대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예리하게 파악하고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할수록 그건 기획의 아주 작은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불킥 중.


나는 사실 멘탈이 강한 편은 아니다. 부정적인 피드백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ego를 넣어두고 이성적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연습이 아직도 많이많이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평균 이상을 준 것은 스스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지고 나서 그걸로 씩씩대거나 우기지 않고, 그때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사색으로 승화시켜 다음 행동에 반영하려고 한다. 이런 논지로 '멘탈이 얼마나 쉽게 깨지냐의 여부보다는 얼마나 빨리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다.


'사회적 메타인지'에 관한 질문도 있었다.


이전 직장의 상사가 나를 평가한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것 같은지?
동료들이 보는 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결국 타인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다. 여러 명의 팀원들과 긴밀하게 협업하는 일이 잦은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평소에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술술 답변이 나왔다. 꾸준히 글을 쓰며 성찰해왔기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 동료들이 보는 나의 긍정적인 면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꼽았다.




근데 왜 뜬금없이 스타트업으로 가냐고? 내가 이 회사와 면접을 본다고 하니까 주변에서는 우려가 많았다.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려고 하냐, 거기 간다고 네 커리어에 무슨 도움이 되냐 등등. 주변 동기들은 하루라도 빨리 개원을 해서 돈을 모으는 게 답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맞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체력이 남아 있을때 확 땡기지 못하면 나중에 늙어서까지 일해야 할 수 있다. 그들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인간이라는(결국 늙어서까지 미련하게 일을 할 팔자라는) 것을 지난 2년간의 근무로 절절히 깨달았다. 나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을―그게 얼마나 많은 돈을 담보할지라도―건강하게 지속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눈물을 훔치며. 많은 돈아 안녕.


모든 면접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경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면접을 봤다. 밀도 있게 일하고 빠르게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분위기가 나에게는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젊고 발전적인 팀원들과 투명하게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업무 환경도 기대가 되고, 대표님 밑에서 배울 점도 많아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언제나 피튀기며 몰입해서 일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사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던 것 같은데 연봉 협상에서 내가 좀 세게 나가긴 했다. 나는 기존 연봉보다 깎는다고 깎았는데 회사 입장에서 쉽게 수락하기 어려운 액수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경험을 하고 싶다고 해놓고 연봉 욕심을 내는 것은 모순일까?) 일단은 마음 편하게 기다리는 걸로. 예전에는 이런 결과에 일희일비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예상치 못한 길로 간다고 인생이 뒤틀리지는 않더라. 내 인생을 바꿔줄 절체절명의 선택 같은 건 없다. 최선의 선택이 존재하리라는 환상은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옳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단단한 삶>, 야스토리 아유뮤

여전히 내 앞에는 미처 확신하지 못하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고 선택의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이지만,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나는 결국 잘 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가 궁금할 뿐. 다시 돌아 백수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이다. 미뤄뒀던 일들을 차근히 하자. 오늘은 먼저 서점에 가서 형광펜을 잔뜩 사야겠다.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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