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일기
스타트업 일기를 꾸준히 쓰려고 하는데 정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아래 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완전 내 얘기.
최근에는 더욱 바빴다. 6주 동안 함께하는 대학생 인턴들을 관리/감독하는 업무가 온전히 나에게 맡겨졌기 때문. 겨우 입사 4개월 차인 내가 벌써 주니어 관리자? 부담이 되는 만큼 더욱 각잡고 임했다. 이들의 성공은 이들의 성공이고, 이들의 실패는 나의 실패라는 마인드로.
참고 :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에는 본과 4학년 때 6주 동안의 외부 특성화 실습과정이 있다. 한의계의 다양한 기업, 학교, 연구실 등에서 인턴십을 진행하는 것.
자, 그렇다면 일을 하러 오셨으니까 일을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다른 곳들은 어떻게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회사는 인턴 님들께도 정말 빡세게 일을 시키기로 유명(?)하다. 하하하. 이왕 오셨는데 뭐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인턴 여러분, K-직장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스타트업 정신을 곁들인.
장난이고.. 나는 '즐겁게 일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밥벌이를 하게 될 그들에게. 내 기준 즐겁게 일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이 업무를 왜 하는지,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어디까지 영향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알고 업무에 임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정의'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즉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업무 실행은 당연하고, 업무 결과를 정리하고 피드백을 받고 향후 보완 방안을 만드는 것까지가 업무의 끝이다. 이번 기획은 왜 효과가 있었나. 실행 방법은 어떤 점이 문제가 있었나. 반드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을 거쳐야만 업무적으로 성장한다는 실감을 할 수 있다.
사실 진료란 건 매우 불연속적인 업무다. 환자는 증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의사를 찾기 마련이고, 치료가 진행되는 와중에 자의적으로 치료를 중단하곤 한다. 그만 만나자는 예고도 없이, 잠수 이별을 때린 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손에서 시작해 내 손에서 끝나는 일이 로컬 진료 현장에서는 참 드물다. (물론 내가 실력이 부족했던 탓이었겠지만.) 그래서 나는 그렇게 헤맸던 걸지도.
다행히 지금은 업무의 주도권과 완결성을 잃지 않으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인턴 분들도 그런 몰입감을 느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턴십 프로젝트에 임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 의미를 찾기 힘든 단순 노동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재수가 없으면 아마 앞으로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도 있다) 2. 어줍잖은 '워라밸'보다 진짜 '몰입'이 훨씬 좋은 경험이다. 너무 꼰대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애초부터 모두 맡겼다. 처음에는 다소 막막했을지도 모르겠다. 업무의 기본 가이드라인만 알려주고 냅다 실전 기획을 요구했으니 말이다. 어렵게 가져온 기획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왜?' 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가면서 수정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지금보다 더 잘할 방법이 있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다행히 인턴 분들은 한 주 한 주가 다르게 점점 더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업무에 적응했고, 정말 많은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막판에는 개떡같이 수정 요청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딱딱 고쳐오는, 키워드 하나만 던져도 기획을 알아서 가져오는 수준까지 왔다. 아유 기특해.
덕분에 나도 6주 동안 많이 배웠다. 늘 꼼꼼하게 체크리스트를 적어가며 놓치는 것 없이 업무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반성했다. 다른 팀 팀원들과도 허물없이 친해지는 그들의 친화력이 인상깊었다. 나도 아직 말을 안 해본 분들까지도.. 늘 느끼는 거지만 조직 사회에서 친화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능력이다.
게다가 매 순간 결정을 내리고 선택해주어야는 관리자의 입장이란 참 고달프고도 머리 아픈 것이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리더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떨 때는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내 학부생 시절에도 이런 인턴십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싶다가도, 그들이 보여주는 파릇한 에너지는 그때의 나에겐 어차피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질투와 체념 사이 이상야릇한 마음이 들고 그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건만, 대학생이 뿜어내는 젊음이란 확실히 K-직장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싸이흠뻑쇼>를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칼출근할 체력이 나에게는 없다. 아, 애초에 물을 '흠뻑'이나 맞아가면서 뛰어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으 생각만 해도 힘들어. 이렇게 아저씨가 되는 것이겠지.
그들이 있어 진심으로 나도 즐겁게 일했다. 가르칠 때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말을 이제 확실히 알겠다. 덕분에 나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카드키를 반납하고 자리를 비웠다. 이제는 매일 17시에 업무보고를 받을 일이 없어졌다니 퍽 섭섭하기만 하다. 6주 간 부족한 관리자 밑에서 고생 많았습니다. 또 봅시다. 안녕.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