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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un 03. 2019

파리에서 당신의 옛 연인을 만난다면

Fight or flight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오 년 전 여름방학, 그동안 모은 돈 모두를 탈탈 털어 난생처음 장거리 비행기를 예매했다. 남들 다 가는 유럽이었지만 나에게는 뭔가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3주간의 혈혈단신 유럽투어는 정말이지 내게 유별난 추억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바로 옛 애인과의 재회라는 쇼킹한 사건. 파리의 한적한 어느 골목에서 말이다.

 



그녀와 사귄 기간은 두 달 남짓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적극적인 대시에 나는 홀랑 넘어가버렸고, 당시 너무 어렸던 나머지 어떠한 확신 없이 관계를 시작하는 우를 범해버다. 꽤 달달하던 첫 몇 주가 지나고 서로에 대한 베일이 어느 정도 걷힐 무렵 나의 이성은 빠르게 그녀에 대한 문을 닫았고, 무례하게도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끝맺음을 지다. 술 취해 걸려오던 전화가 몇 번, 학교 앞을 찾아온 적도 두어 번, 최대한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었던 나는 끝까지 그녀가 마음 기댈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2년 후, 파리의 인적 드문 어느 골목에서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프랑스 파리에서. 값이 꽤 나가는 식당을 방문하기 위해 동행을 구했는데, 내가 연락을 먼저 하고도 그녀의 신상에 대해 미처 확인하지 않았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니까 메신저 프로필을 본명이 아닌 이니셜로 하다간 나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다들 조심하자.) 그 걸음걸이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뭔가 익숙한데,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고, 그녀의 이목구비를 어렴풋하게 확인할 수 있을 때쯤 교감신경이 항진됨을 느낄 수 있었다. fight or flight. 투쟁-도피 반응으로 알려져 있는 이 현상은 긴박한 위협 앞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생리적 각성 상태로,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 동물의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렇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2년 동안 치밀하게 계획하여 마침내 내 앞에 나타난 거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시체를 처리하기 용이한 이국의 어느 강 근처에서. 그게 아니고서는 이 얼토당토않은 우연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실로 놀라운 그녀의 설계에 감탄함과 동시에 전율을 느끼던 찰나, 그녀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나를 알아보고는 짐짓 쿨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여행 차 파리에 머물고 있다고 설명하는 그녀에겐 다행히도 가 들려있진 않았다. 황당함과 반가움과 어색함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당장 식사를 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근처 공원에 자리잡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옛날 내 잘못에 대해 상세히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현자의 얼굴을 한 채로, 덕분에 많은 내적 성장이 있었음에 오히려 감사하다며 나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일부분 내려놓고 안한 레스토랑에서 근황 토크를 이어나갔다. 그녀가 이따금씩 나이프를 쥘 때마다 목덜미가 아찔했으나, 다행히 나는 체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세느 강변을 걸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와 말은 정말 잘 통했었지, 하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다소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곡을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나에게는 없는 예리함이 그녀에게는 있었다고나 할까. 그 솔직하고도 당돌한 매력에 속아 넘어갔었다는 말을 장난스레 건네니, 연인이란 의무감을 지우고 만나오히려 더 편하기도 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묵혀둔 수다를 떨며 반나절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서로에게 남겨둔 미련이 없었기에 영화 같은 재결합이나 낭만적 하룻밤 따위의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운명이 한번 더 우리를 만나게 했다는 점에서, 완벽히 맺지 않은 것들은 언제가 됐건 반드시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돌아온다는 삶의 교훈을 발견하고는 서로에게 두 번째 안녕을 고했다.


(2019.06.02)



<'여름' 주제로 글쓰기>

또 가고 싶은 파리. 옛 연인을 만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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