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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May 19. 2019

입뺀을 당하며

대학 축제 후기



어느새 계절은 여름을 향해 빠르게 내달리고 있고, 그에 발맞추어 각종 대학 축제시즌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도서관에 전공서적을 빌려야 할 일이 있었던 나는 하필이면 그 시즌의 한가운데 학교에 들리게 되었고, 마침 개교 70주년을 맞은 나의 모교는 전례 없이 성대한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다. 재작년 완공한 신축 학관의 냄새도 맡지 못하고 새로 깔린 천연 잔디 운동장에서 양껏 굴러보지도 못한 저주받은 내 학번 세대는 70주년 기념 축제에도 배제되어 버린 것인가. 아, 우리 학번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경영대생 11학번 잔나비 보컬 최정훈. 그는 축제 무대의 초청 가수로 당당히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그렇게 환호를 받으며 모교에 화려하게 돌아온고 하는데, 와서 그가 지금껏 냈던 등록금을 공연 대금으로 한 큐에 되돌려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순간 장학금과 담쌓고 6년간 꼬박꼬박 지불한 수천만 원이 떠올라 마음이 돌연 황폐해졌다. 내 찢어지는 가슴은 아랑곳 않고 축제 분위기는 갈수록 고조되었고, 젊음과 낭만과 술기운이 알맞게 감도는 캠퍼스 분위기는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어두워진 캠퍼스를 환하게 밝히는 발그레한 얼굴들과, 더러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를 꿈꾸는 이들이 사방에 뿜어내는 이글거리는 눈빛들 한복판에서 '젊음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앳된 얼굴들에서 나오는 광채였다. 말하자면 특별히 피부가 좋아서라기보다, 유달리 표정이 밝아서라기보다, 그저 싱그러움이 만발한 낯빛 그들에겐 있고 나에겐 없었다. 1일 1팩을 하고 아이크림으로 샤워를 하는 등 아무리 발버둥쳐도 메워지지 않을 세월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던 와중, 문득 박완서 선생님의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 남자네 집>, p79-80)




그렇게 깨우침을 얻은 후, 공연이나 구경할까 하고 원형 극장에 입장하려는데 웬걸, 학생증을 지참한 본교 학생만이 정면 좌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축제는 졸업생 나부랭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 나도 꽤 최근까지 학생증이 있었다고 강짜를 부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한 '외부인' 전용 출입문으로 초라하게 입장하면서, 대학이라는 나의 옛 내집단에서 철저히 내쳐져 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토록 자유롭게 뛰놀던 교정이었는데. 그렇게 익숙하고 지겹고 넌덜머리 나는 캠퍼스였는데.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씁쓸함이 텁텁하게 남았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임어쩌겠냐만은.


사실은 그렇다. 젊음과 소속이란 원래 일시적이다. 새들이 빈번히 둥지를 옮기듯 우리의 소속도 항상 변하고, 새들이 결국 둥지를 떠나듯 젊음도 결국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아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날들도 꽤 많을지도 모르고, 사진첩을 보다가 그때와는 너무 달라진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속이 없다고 해서 사회로부터 유리되었다는 뜻은 아니며,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마음까지 따라서 늙어버리란 법은 없다. 떠나간 젊은 날을 그리워하거나 소속을 바꾸기를 주저하는 영혼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나를 위해 쓰는 것이다. 비록 오늘은 입뺀을 당했지만, 잔나비처럼 멋지게 컴백하는 날을 꿈꾸며.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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