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뜬금없이 청첩장을 꺼냈다. 우리는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것을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다 하게 되겠지마는 제일 얌전한 그 녀석의 가방에서 그 파스텔 톤 봉투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자였구나, 짜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우리는 고향 동네에 모인 겸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와는 너무 많이 변해버린 이 곳 풍경과 우리 사는 환경에 대해서 떠들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 자기 밥벌이 정도는 하고 있고, 한 녀석은 인생의 거사를 앞두고 있으며, 예전 그 앳된 얼굴들은 이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대화주제 역시 프러포즈를 비롯한 결혼 준비가 얼마나 골치 아픈지, 회사 업무나 상사는 얼마나 지루한지, 우리가 살던 동네의 재건축 소식은 어떠한지 등 꽤나 고리타분한 종류였다. 그 날 우리 얼굴이 벌게졌던 건 결단코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세월에게 섭섭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가 한 녀석은 공대 석사생답게 요즘은 변하는 것이 하도 많아서 기본 물리량 단위조차 변한다는, 다소 학술적인 수다를 늘어놓았다. 어리둥절한 문과생 친구를 내버려두고 우리는 그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말인즉슨, 국제단위계(SI)의 7개 기본단위 중 질량/전류/온도/물질의 양 등 총 4개 물리량에 대한 단위가 새롭게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예를 들자면, 1889년에 만들어진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질량으로 정의되어 왔던 ‘킬로그램’은 현재 해당 원기의 질량이 50㎍ 변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수정이 불가피해졌다고 한다. 기준 단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는 측정값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값이 일정한 상수를 도입해 도량형을 새로 규정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그래, 백 년을 이어온 도량형의 정의도 새로 써야 하는 마당에 어디 변하는 것이 그뿐이랴.
우리가 변하지 않으리라고 무심코 믿어온 것들 중 대부분이 실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비단 물리량 단위뿐 아니라 고혈압 진단 기준과 같은 의료 가이드라인은 때때로 개정되고, 태양계 언저리에서 심심하게 지내던 명왕성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이제는 죄수번호 같은 134340으로 불리고 있다. 굳이 어려운 과학 분야까지 가지 않아도 당신의 얼굴과 눈가 주름, 당신의 복부 지방과 근육량, 당신 머리카락의 굵기와 개수 등 당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의 오늘과 내일이 같지 않다. (당신이 대머리라면 미안하지만 모발 분야에서 당신은 예외다.)
온갖 변하는 것들 중에 으뜸은 역시 마음이다. 그때 내 마음을 흔든 그 물건은 막상 갖고 나니 더 이상 그렇지 않고, 취향이나 입맛 같은 나의 고유한 정서들도 달라지며, 일에 대한 열정도 사람에 대한 애정도 결국에는 변하기 마련이다. 사람 마음이 제일 어렵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이유는 그 변화 과정에서 일정한 패턴이라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급하게바뀐 메뉴나 식어버린 사랑과 같은 변덕은, 그 동기나 원인이 항상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탓에 예측도 대비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대부분 마음속에서 떠난 것들은 아무리 야단을 쳐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후회할지언정.
모든것은 변화무쌍하다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깨달아버리고 나니 무엇에 의지해 어떻게 살 것인가 막막하다면 여기 응용해볼 만한 대책이 있다. 오늘 새로 만나는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베풀어라. 나를 비롯한 그들은 내일이면 흔적만 남기고 온데간데 없어질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