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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남 주고 싶다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또 다른 명분

by 코리디언


무더운 여름 히트워닝(Heat Warning)경고가 뜬 이른 아침, 딸아이를 출근시킨 뒤 집안일을 서둘러 끝냈다. 기온이 오르기 전에, 더 무더워지기 전에 바깥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위해 일찍 외출했다.


은행에 들러 마지막 볼일을 보고 차가 주차된 길을 따라 걷던 중, 한 SUV가 도로 옆에 서더니 빨간 캡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내렸다. 그 할아버지는 차 문을 닫으시면서 잠시 중심을 잃으신 듯 휘청거리시더니, 결국 뒤로 넘어지셨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할아버지께 달려갔고, 마침 그 옆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먼저 달려가 부축해 주고 있었다.

내가 “Are you OK?”라고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I am not”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의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차에 앉아 있던 아내로 보이시는 할머니가 운전석에서 내려 911에 전화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가방에서 전화기를 찾는 사이, 다행히 은행 담벼락에서 담배를 피우던 두 남자가 달려와 대신 911에 신고했다. 그들의 통화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나는 몇 단어를 통해 그들이 우리의 위치를 알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갔을 때,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것을 발견했다. 머리를 받치고 계시던 할머니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당황해하셨다. 나는 차로 달려가 크리넥스 티슈 박스를 가져왔지만, 이미 그 할머니는 자리를 떠났고, 아내이신 할머니가 머리를 받치고 계셨다. 911에 신고했던 두 남자도 곧 자리를 떴다. 곧이어 길을 가던 여성 한무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 여성들은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할아버지의 자세를 조정해 주었는데 그녀들의 행동으로 봐서는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SUV 한 대가 우리 앞을 지니치는듯 하더니 서서하 멈춰 서더니 한 남성이 내려왔는데, 차림새와 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의사 같이 보였다.

나는 크리넥스 티슈박스를 계속 들고 있었지만 딱히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다시 차로 돌아왔다.

할아버지가 쓰러진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멈춰서 돕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몬트리올 지역 신문인 가제트( The Gazett) 에 실린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

제목은 ‘Paramedic refused to speak English’였다.

91세 영어권 할머니가 응급 상황에서 이웃의 한 여성이 911에 전화를 했고, 할머니의 상태를 영어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응급 구조대(Urgences‑santé) 구급대원이 “우리는 퀘벡에 있으니 프랑스어를 씁니다 (“We’re in Quebec, we speak French.”)”라고 말하며 영어 요청을 거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은행 앞에서 쓰러진 할아버지는 다행히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두 남자 덕분에 구급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없었고 내가 영어로 구조요청을했다면 어쩌면 나도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법적인 맥락에서 보면, 퀘벡은 기본적으로 공공 서비스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우선시하지만, 응급·보건 상황에서는 영어 등 다른 언어 사용이 허용되어 있다.

OQLF(Office québécois de la langue française – 프랑스어 사용 보호 사무소)와 법령에 따르면 응급 상황에서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필요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때문에 해당 발언은 적절치 않았다는 반응이 대세다.

따라서 “프랑스어만 써야 한다”는 주장은 법적으로 옳지 않으며, 특히 응급 상황에서는 적절한 언어로 의사소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911(Urgences‑santé)은 “프랑스어만 써야 한다”는 발언 자체는 사실이지만, 업무 수행 중 제삼자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하며 궁색한 변명으로 사안을 옹호했다.

응급 상황에서 보호자의 언어 요청을 거부한 것은 분명 논란의 대상이며, 퀘벡 언어 법령 상으로도 잘못된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동안 나는 몬트리올에서 프랑스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주로 개인적인 면에서 찾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철이 들어서인지 오늘 길에서 쓰러진 할아버지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어를 꼭 배워야겠다’는 새로운 명분이 생겼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졸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들이 “배워서 남 주냐? 공부 좀 해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배워서 남 주는 일 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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