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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의 잡학다식 Aug 26. 2021

다시 한류를 생각한다

  다시 한류다. 올해 방송콘텐츠 해외 수출 지원 업무를 맡게 되어 세계 주요 방송영상 콘텐츠 마켓 참가를 돕고, 수출용 콘텐츠의 번역, 더빙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 데다 중동, 아프리카, CIS 등 아직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많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우리 드라마를 무상으로 배급하는 사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한류라는 말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에서 일할 때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도 한류였다. 한인 동포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국 대중문화는 마이너리티. K CON, LA 같은 행사에서 한류 팬들을 만나는 일은 매번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뉴욕, 마이애미, 상파울루, 리마에서 한국 드라마를 말하고, K-pop 한 줄이라도 흥얼거리는 현지인을 마주치는 날, 어색한 억양이지만 ‘안녕하세요?’ 한 마디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가 가까운 한류의 발원지 대한민국에서 한류를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류팬’이라는 이름의 덩어리, 혹은 통계 숫자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멀리, 저 멀리... 한국 대중문화 팬을 손으로 셀 수 있는 지역에 가보면 드디어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 나이, 직업, 좋아하는 가수, 왜, 어떻게 한국 드라마, 노래를 만났는지... 펜실베이니아주에 사는 라틴계 20대 C는 드라마 ‘일지매’를 가장 좋아한다고 응답했고, 앨라배마주에 사는 10대 백인 여성 A는 ‘미남이시네요’를, 마이애미 20대 아프리카계 L은 ‘드림하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썼다.

  2014년 10월 말, 한국 콘텐츠 미국시장 소비자 조사를 진행하면서 나는 전율했다. 설문조사 사이트를 개설하고, 결과를 시간 단위로 받아보면서 응답자의 이름, 거주 지역, 인종,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내 한류팬’이라는 막연한 이름의 군집명사가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 존재로 다가온 가슴 떨린 시간을 잊을 수 없다. 2,306명. 이름, 나이, 성별, 인종, 거주 지역이 다르지만, 일주일 평균 5시간 이상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다는 미국 열혈 팬들의 명단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한류의 정체는 무엇인가? 강물인가? 바다인가? 사람마다 많은 답이 있겠지만, 나에게 한류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길이다.

  미국 한류 팬들에게 어떻게 한국 콘텐츠를 알게 되었는가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족,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고 응답했다. 누군가 전했고, 누군가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 K-pop에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이 친구, 가족에게 전하고,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어폰을 나눠 듣고,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러다가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고, 유튜브가 활성화되자 여기저기 우후죽순 샘이 터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큰 강물, 그것이 한류다.

  한류는 상류에서 누군가 발전기를 돌려 일방향으로 흘려보냄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 구석구석 한국 콘텐츠 팬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에 고인 뜨거운 샘이 넘쳐 다른 이에게 전파된 양상이다. 한 점 한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었으며, 면이 쌓여 입체가 되고 마침내 굽이쳐 흘러 나타난 전 지구적인 문화 현상. 그것이 한류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류를 활성화하자 하고, 재점화 하자고도 한다.(강물에 불 붙인다는 말은 되는 말인가? 안 되는 말인가?) 새로 조직을 꾸리고, 일을 도모하자고도 한다. 좋은 일이다. 여러 계획을 세우겠지만, 그때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바로 전 세계 한류 팬이다. 상업적으로 말을 한다 해도, 한류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한국 콘텐츠에 시간과 돈을 많이 쓴다는 것 아닌가? 누가?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은 시청자, 소비자, 유저, 관(람)객, 독자의 이름으로 마케팅 타깃이 되겠지만, 그 보다 먼저 팬으로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전 세계 ‘시장’에서 도움받아야 할 사람들 역시 그 팬들이므로....


  요새 ‘사람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멋진 말이다. 한류 정책 중심에 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한류 팬들의 활동을 응원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알아주고, 열심이 식지 않게 할 것인가? 한국을 알고 싶고, 오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과 어떻게 일상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것인가? 혹시 마음 다치는 팬들은 없나? 사기당한 사람은 없을까? 지나친 상업주의와 싸구려 접근방식을 막을 수는 없나? 세계 주요 도시에서 큰 이벤트를 열고, 화장품, 패션, 음식, 소비재와 결합해 현지 시장에 진출하는 것도 필요한 일인데 먼저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자세히... 그래야 나머지 활동과 사업도 고급스러워지고, 오래가지 않을까?


  한류 활성화, 본질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숫자로, 그래프로, 정량적 목표를 앞세워 조급하게 덤벼들면 필패다. 유서 깊은 미국의 팬 베이스 이벤트 ‘샌디에이고 코믹콘’ 같은 행사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도 비즈니스가 있고, 기획과 조직이 있으며, 셀럽들이 무대 위에 반짝거리지만, 그 중심에는 팬이 있다. 모든 프로그램은 팬을 위해 존재하고, 팬이 우선이며, 팬과 팬은 서로를 존중한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평가받는 K CON, LA의 존재방식과 작동원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만사에 근원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 이루어진 결과로 만난 어떤 큰 물결, 한 순간 벼락같이 찾아온 축복 ‘한류’... 그 뒤에는 한국 드라마, K-Pop을 만난 기쁨을 어쩌지 못해 가족, 친구에게 전한 누군가가 있다. 그 한 사람을 모르면, 그 뜨거운 마음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한류를 모르는 것이다.

  지구촌 한 사람 한 사람 가슴에 고이고, 차고, 넘친 샘물, 그 수억의 일렁임이 연결된 거대한 흐름이 바로 한류다.


- 2018년 10월, facebook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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