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성탄절

세기말, 문정현 신부님 인터뷰

by 김PD의 잡학다식

1999년 12월 말, 사람들은 새 천년이 열린다고 했고, 세계 곳곳에서 뉴밀레니엄 이벤트가 계획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가 몰고온 찬바람이 절정에 달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고, 금리는 15%를 상회하고 있었으며 나 역시 월급의 20%를 반납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3년차 햇병아리 PD, 전주에서 주 1회 30분 짜리 저녁 생방송을 맡아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요일은 인물 한 사람과 집중 인터뷰를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때마침 성탄절 전야가 내 방송 차례였던 것 같다. 궁리 끝에 익산에서 사역하는 문정현 신부를 섭외했다.


두 가지를 물었다.


"신의 뜻을 좇는 사제입니다. 평생 노동자, 농민을 돌아보느라 교회 일에 소홀한 것 아닙니까?"


그가 답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억눌리고 핍박받는 사람과 함께 하라고 명했습니다. 이 시대 어렵고, 고통 받는 노동자, 농민과 함께 하는 일이야 말로 사목 활동의 본질입니다."


그는 나를 직장 폐쇄 위기의 기아특수강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는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긴 병 앞에 효자 없다고, 오랜 집회, 시위로 노동자들은 지쳐 있었다. 노동자 몇 명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들에게 문 신부는 형제이고, 친구이며 아버지였다. 석양의 군산 앞바다, 겨울 찬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다음 날 아침, 전주에서 사역하는 동생 문규현 신부가 찾아왔다. 형은 노동자, 농민과 함께 하느라 동생은 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로 판문점에서 임수경을 데리고 돌아온 죄로 감옥에 다녀왔다. 건강이 온전할 리 없건마는 형제는 서로의 사목 활동을 지지했고, 응원했다.


또 질문했다.


"내일이면 서기 2000년,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건가요?"


"내일은 또다른 오늘입니다. 내일이 오면 우리 시대의 과제가 거져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평화, 통일, 환경..우리가 직면한 이 문제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일도 똑 같습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흰 수염 덥수룩한 노사제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직하지만 울림이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마지막 부탁.


"곧 성탄절입니다. 외환 위기로 몸도 맘도 추운 사람들에게 사제로서 메시지를 전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습니다. 세리, 병자, 창녀와 함께 하였습니다. 고통 받는 이웃의 형편을 돌아보고, 그분들과 함께 하십시오. 신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다리로 우리를 배웅하였다. 유신 때 당한 고문 후유증이라고 했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났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부산에서, 울산에서… 오랜 분규에도 해결되지 않는 정리 해고, 비정규직, 손해배상 청구. 출구 없는 죽음의 절규에도 메아리는 없다. 우울하고, 답답하다.


10년이 더 지난 세월…우리 사회는 나아졌는가?

일요일 저녁, TV는 웃고, 즐기고, 떠드는 연예인들의 목소리로 가득하고, 교회와 거리는 장식과 조명으로 휘황하다. 슬픈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20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