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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의 잡학다식 Aug 26. 2021

주례를 서다니...

11월이 되면 만나는 부부가 있다. 10년 전 내가 맡았던 기획창작아카데미 교육생들인데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친구들...

2016년 11월, 마흔 여섯이던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운, 별스러운 추억이 되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결혼기념일, 나의 생일이 들어 있는 11월에 만나는데 올해로 삼 년 째다.

  아내는 이름 대면 알만한 방송사의 드라마 기획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고, 남편은 라디오 PD 일을 접고, 전업 드라마 작가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데 10년 전 꿈꾸던 일을 찾아 열정을 쏟는 모습을 보니 즐거웠다. 업계 얘기, 개인적 얘기, 함께 아는 이들의 근황 등등 오랜만에 재미난 얘기를 나눴다. 양가 어른들께서 지금도 가끔씩 내 주례사 말씀을 하신다고. 허허 참.

정작 내게는 그 원고가 없다 했더니 부부가 이메일을 보내줘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나 부끄러운 글...ㅠㅠ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김일중입니다.

 오늘 신랑,신부와 인연이 깊은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저를 소개해주신 원호섭 성우님과는 오래 전에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했습니다. 한 15년쯤 된 거 같은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먼저, 신랑, 신부 두 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 가족 친지, 친구 여러분께도 축하 말씀 드리고, 귀한 시간 내서 와주신 하객 여러분께도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주례 부탁을 받고 여러 차례 거절하고, 사양했습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아도 제가 아직 결혼식 주례를 맡을 입장은 아닙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과 이 예식에 오신 여러 어른들께 대단히 송구하고, 부끄럽습니다.

 신랑 문OO 씨와 신부 임OO 씨는 2009년 제가 맡았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 기획창작아카데미 학생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신랑, 신부 모두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듀서 지망생이었는데 클래스 안에서 가장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1년 과정을 마치고, 출석, 과제, 프로젝트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학생들에게는 해외 콘텐츠 전시마켓에 보내주는 특전이 있는데 임OO 씨와 문OO 씨가 선발됐고, 둘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함께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견문을 넓히고, 정보를 습득하라고 보냈는데 아마도 거기서 눈이 맞은 것 같습니다. 그 후로 7년 세월이 지나 신랑은 OO TV에서, 신부는 드라마 기획 PD로 각자 멋지게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참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이렇게 두 분을 오래 보아온 인연과 책임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주례사라기보다는 인생을 조금 더 먼저 살기 시작한 선배로서 두 분께 드리는 조언이자 축사라고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올해로 17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만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서툴기만 합니다. 두 분께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부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고, 또 살면서 서로 닮아가기도 하겠지만, 두 분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또 각자 인생의 길이 있습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두 분 모두 미디어와 콘텐츠를 다루는 프로페셔널이기 때문에 각자 전문적인 영역을 인정받아야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제 결혼생활을 돌아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이 처음에 아내가 저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생각이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더군요. 그래서 부끄럽게도 많이 다투고, 큰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거의 다 제 잘못과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고 독립적인 두 사람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둘 만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친구, 부모는 물론 심지어 자녀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 특별한 관계가 부부이고, 부부는 이 영토 안에서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든 것을 나누고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이해와 배려, 그리고 예의입니다. 특별히 서로의 자존심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의 성역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절대 넘어설 수 없고, 넘어가서도 안 되는 것들이 있죠. 상처, 아픈 기억, 콤플렉스, 비밀, 자부심...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남편과 아내는 반드시 ‘마음의 성역’을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배우자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아주 오래 갑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 부주의한 행동이 상처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고, 예의를 다 하시기 바랍니다. 부부처럼 편한 사이가 없지만,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늘 신중하게 주의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훈련과 연습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부부 사이에 존칭을 쓰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절대 큰 목소리 내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이야말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문OO, 임OO 두 분은 프로듀서입니다. 프로듀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늘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두 분의 이름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 내시기를 기대합니다.

 11월 20일, 가을이 아주 많이 깊었습니다. 먼 훗날 두 분 인생이 만추에 이르렀을 때 이 계절처럼 깊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빛나기를 축복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년 11월 20일


주례 김일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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