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지난달 말, 외신에 눈길을 끄는 부고 기사가 실렸다. 101세 아프리카계 미국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인류 최초로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거리와 궤도를 계산한 미 항공우주국 출신 수학자 캐서린 존슨이다. 2017년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는 NASA 최초 흑인 여성 수학자 캐서린 존슨과 동료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캐서린 존슨은 1962년 존 글렌의 미국 최초 유인 우주궤도 비행, 1969년 아폴로 11호의 인류 최초 유인 달 탐사 임무에 참여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녀와 동료들의 천재적인 계산 능력과 탁월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아직 백인과 유색인 간에 화장실을 따로 쓰는 인종차별의 시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한 과학계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장벽을 넘어 도전, 성취를 이루어냈는지에 집중한다. 당대 최첨단의 과학과 기술을 소재로 하는 영화지만, 주제는 자유, 평등, 의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가치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왜 달에 가려고 했을까? 전설, 신화와 함께 수 천 년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자리 잡아온 달에 대한 궁금증, 누가 먼저 달에 갔는지 경쟁에서 이기려는 냉전시대의 정치적 욕망 등 여러 이유가 있었겠다. 하여간 이전까지는 그저 꿈과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했던 달나라 여행을 실현하고자 한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결국 유인 달 탐사를 가능하게 한 것 아닐까?
최근 중국의 우주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눈부시다. 중국 우주개발 기구 국가항천국은 2018년 12월 달 탐사선을 발사해 이듬해 1월 3일 인류 최초로 달의 뒷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달 뒷면을 돌아다니며 토양, 광물 성분을 분석하고, 생명체 반응성을 살피는 실험을 수행할 임무를 띤 이 우주선의 이름은 ‘창어 4호’다. 창어는 우리말로 상아(嫦娥)인데 달나라에 산다는 전설 속 여신의 이름이다. 원래 항아(姮娥) 또는 항아(恒娥)였는데 서한(西漢)의 문제 유항(劉恒)과 이름이 겹치는 것을 피해 상아로 바꿨다고 한다. 미인을 이르는 표현 ‘월궁항아’가 여기서 나왔고, 항아가 산다는 달나라 궁궐을 廣寒宮이라고도 하는데 남원 광한루의 유래 또한 여기서 왔을 것이다. 송창식이 부른 ‘상아의 노래’ 역시.
중국 정부는 왜 자국 첨단과학기술의 결정체인 달 탐사선 이름에 전설 속 달나라 여신 이름을 붙인 것일까? 거기에는 수 천 년 상상력 만큼이나 오롯한 자부심이 숨어있을 것이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만든 우주선에 로마 신화 태양의 신 ‘아폴로’를 붙인 것처럼.
로켓을 쏘아 올려 달까지 안전하게 날아가게 만든 기술은 분명 물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누천년 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시, 소설, 곡을 쓰게 하고, 과학기술을 동원해 인간이 달에 발 딛도록 만든 힘은 누적된 인문학적 상상력 아닐까?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세상에는 당장 논리와 증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상상과 통찰로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고, 그것이 연구를 추동하고 그 결과 상상과 꿈이 눈앞에 실현되기도 한다. 아직은 상상의 영역, 그러나 언젠가 논리와 과학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잇는 다리, 바로 인문 정신이겠다. 그러니 지금도, 앞으로도 인문학은 소중하다. (2020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