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 훈 <공무도하>
소설이라기보다는 르뽀르따쥬. 부조리한 시대와 세상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기자 김훈의 어퍼컷.
김훈은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의 소설은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깨도록 만든다. 세상은 살만하다고, 인간은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부조리로 가득하고, 인간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다고, 사람의 죽음엔 성스럽거나 죽을 만큼의 악독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고, 그게 인간이고, 삶이라고... 그리하여 그의 펜 끝은 천상의 언어를 꿈꾸지 않고, 도시의 밑바닥, 시궁창, 말라서 쩍쩍 갈라진 개펄 진창을 긁는다. 팩트만 살려 아주 드라이하게. 이때 그의 펜은 쇠꼬챙이가 된다. 현실에 비껴선 채 권력과 미디어가 제공하는 달콤한 솜사탕에 길이 들어 정신에 비계가 낀 소시민의 가슴을 찌르는.
그는 오랜 시간 현역 기자였다. 한국일보, 한겨레, 예전 시사저널의 편집장까지. 기자에게 글이란 칼럼이 아닌 이상 사건의 기록이고, 그의 문장은 미사여구 없이 육하원칙에 따라 쓴 스트레이트 기사에 가깝다. 다만, 현실에 없는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픽션으로 분류할 뿐.
미군 포탄, 바닷속, 해망, 방천석, 박옥출 <= 문정수 = 노목희 => 타이웨이, 사막, 낙타, 시간 너머, 역사
소설 <공무도하>의 주인공들은 글을 쓰거나 글을 다룬다. 주인공 문정수와 그의 연인 노목희, 그리고 타이웨이 교수. 문정수는 사건을 좇아 시궁창을 헤매고, 노목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서역과 신라를 잇는 혜초의 시선을 따라 문명과 역사와 시간을 오가는 현실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문정수뿐 아니라 노목희 또한 김훈이다. 문정수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六何)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을 쓰지 못할 때 노목희에게 전화를 건다. 한밤중, 새벽.."나 가도 돼?" 그리고, 노목희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노목희는 문정수를 다독인다. "쓰지 마. 내 버려둬."
어쩌면 김훈은 타이웨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문 사회부 기자는 세상의 밑바닥을 긁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무좀 같은 사건을 취재해 현실을 환기하고, 출판사 편집자는 문명의 흐름을 다루는 인문서적을 통해 지도에 없고, 시간에 걸리지 않는 높고 아득한 정신의 세계, 사막 너머, 수 천 년 전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김훈의 시선과 글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아는 사람 알거니와 그의 글은 이 시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미문이다. 묘사는 탐미를 넘어섰고, 정신의 지문(指紋)으로서 우리말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낮달이 뜬 사막은 아침도 저녁도 아니었다. 노을인지 시간의 그림자인지 푸른 기운이 대기에 번졌고, 지평선은 낙타의 무릎에 걸려서 느슨했다. 낙타는 콧구멍을 바람에 열어놓고 지평선 너머를 냄새 맡고 있었는데, 콧구멍 언저리가 메말라 보였다. 낙타의 눈은 눈꺼풀이 겹겹이 주름져서 무거웠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에서 낙타의 눈동자는 먼 것을 당기는 시선으로 화폭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낙타의 시선이 끝나는 화폭의 가장자리에서 색은 사위었다. 들린 앞발에서 발바닥이 보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발바닥에 낙타의 생애는 굳은살로 박여 있었다. 굳은살은 부드러워 보였고, 그 부드러움 속에서 생애의 무게는 풍화되고 있었다. (중략) 늙음이 그 종족의 유전자에 각인되어서 늘어진 목과 주름진 눈꺼풀, 갈라진 발바닥은 늙음 속에서 점지되고 태어나는 것이며, 늙음은 애초부터 그 종족의 골격과 표정 속에 배어 있어서, 낙타의 생로병사는 한 덩어리로 들러붙어 있었다. 낙타의 젊음과 늙음은 구별되지 않았고 낙타는 그 두 쪽을 모두 합쳐서 늙음에 도달해 있었다. 노목희의 낙타는 그 늙음의 힘과 늙음의 리듬으로 사막을 건너가는 듯했다.'
소설의 끝에서 노목희는 꿈을 따라 스위스 바젤로 떠나고, 문정수는 현실의 자리인 출입처 경찰서로 간다.
단 몇십 초의 아주 건조하고 짧은 통화만 남긴 채. 강 이쪽과 저쪽은 그렇게 가깝게 있고,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은 여전히 문제 많은 세상에.
소설 <공무도하>, 작가 김훈은 내게 현실을 되돌려 주었다. 발 딛고 선 땅은 여전히 문제 투성이, 곳곳이 지뢰밭이다. 일도 사람도. 배신과 약육강식, 경쟁, 이기주의, 사기, 미스커뮤니케이션...
어느 후배가 말했듯, 1월 1일은 12월 32일 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 삶은 그저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 저러한 세월에도 무늬가 있다. 강 건너엔 무엇이 있을까? 시간 너머엔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김훈은 이 말 안 되는 세상에도 길고, 멀고, 깊은 것이 있어 눈을 들어 먼 곳을 당겨 바라볼 수 있을 때 인간에게 희망이 있음을 말하려 한 것, 아니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닐까? 그때 삶의 문양은 비열하고 비루하고, 더럽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운가? 김훈의 소설은 더럽고, 치사한 인간성에 집중하지만, 그의 눈은 시간 너머를 바라보는 영원함에 닿아 있다. (2010년 1월, 블로그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