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리뷰, 피아니스트 임현정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우리에게 아직 낯선 이름, 피아니스트 임현정. 그녀의 첫 음반은 여러모로 기록적이다. 스물여섯 살(1986년생) 신인이 데뷔 음반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 발매한 것은 클래식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직접 음반 프로듀싱을 맡아 소나타 전곡을 ‘영웅적 사상’, ‘영원한 여성성’, ‘극단적 충돌’, ‘자연’ 등 8개의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작품 해설을 썼다. 하루에 15시간씩 매달려 모든 곡을 중단 없이 3번씩 연주한 끝에 단 29일 만에 녹음을 마쳤다고 하니 대단하다. 더 놀라운 일은 임현정의 이런 제안을 115년 전통의 명문 레이블 EMI 클래식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클래식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아이튠즈 클래식 차트에서도 요요마, 안드레아 보첼리 등 쟁쟁한 아티스트를 물리치고 1위에 랭크됐다. 그녀의 이런 행보는 우연이거나 행운일까? 일각에서는 그녀를 ‘혜성처럼 등장한 신데렐라’이거나 빠르게 치는 독특한 스타일로 유튜브를 달군 ‘깜짝 스타’ 정도로 평가 절하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임현정은 폴리니, 아쉬케나지, 짐머만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해리슨 패롯’ 소속이다. 실력과 가치, 잠재력을 인정했다는 것인데 이런 불황에 클래식계의 세계적 고수들이 아무 근거 없이 ‘선수’를 발탁했을 리 없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알면 알수록 놀랍고 신비한 음악가이다. 1986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을 졸라서 혼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콤피엔느 콘서바토리에 입학해 피아노, 이론 부문을 5개월 만에 최연소 조기 수석 졸업, 프랑스 노르망디 전국 부문 음악 디플롬을 만 15살에 최연소로 취득, 루앙 국립 음악원 피아노 및 실내악 부문 최고연주자 과정 수석, 최연소 취득한 뒤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 최연소 입학해 역시 3년 뒤인 만 19세에 피아노 부문을 최연소로 조기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벨기에 최고 명문 퀸 엘리자베스 국립음악원 최고 연주자 과정에 합격하고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는데 이 정도면 천재성을 두루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EMI가 임현정에게 처음 제안한 음반은 베토벤이 아니라 라벨과 스크랴빈이었다. 그러나 임현정은 이미 수년 전부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구해 왔고, 프로그램 해설까지 직접 다 써놓았을 만큼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먼저 녹음할 수 없었다고 한다.
"베토벤에 관한 책을, 제가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서 읽었어요. 베토벤의 편지 3천 페이지를 읽었고, 베토벤의 일기, 남들이 베토벤은 피아노를 어떻게 연주했다 등등 그에 대해 묘사한 글들을 다 읽었어요. 내 친구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자세히 알 수는 없을 것 같아요.” (SBS 김수현 기자 ‘취재파일’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모두 32곡이지만, 이번 음반에는 19번, 20번을 빼고 30곡만 녹음했는데 SBS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9번과 20번은 베토벤 자신이 출판을 원하지 않았던 거예요. 어린 제자들 연습시키기 위해서 썼던 작은 작품이죠. 그런데 베토벤 동생이 돈이 없어서 그냥 출판사에 판 거죠. 이 두 곡은 베토벤의 평생의 걸작 사이클에 들어가는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임현정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음악을 한다’는 점이다. 해석에 있어 주관이 뚜렷하고, 스타일이 자유롭고 개성이 넘친다. 그녀의 연주는 심사위원들이 좋아하는 ‘스탠더드’나 상 타기 좋은 모법 답안과 거리가 멀다. 실제로 임현정은 파리음악원 졸업 이후 한 차례 콩쿠르에서 입상한 적이 있으나 그 후로 다시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콩쿠르가 등용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음악으로 경쟁하는 것을 싫어해 ‘콩쿠르에 나가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임현정의 연주는 현대적이고, 회화적이며 흐름을 중시한다. 몇몇 곡에서는 재즈 느낌까지 든다. 특히, ‘빠르기’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각이 있는 듯하다. 흔히 임현정의 장기를 ‘속주’라고 생각하는데 ‘햄머클라이버’를 제외하고는 전체 빠르기가 다른 연주자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비교를 위해 아르투르 슈나벨의 1930년대 연주부터 에밀 길레스, 번 클라이번, 클라우디오 아라우, 빌헬름 켐프, 랑랑의 연주까지 들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현정의 연주가 다르게 들리는 것은 그녀가 템포를 밀고 당기면서 자유롭게 조절하는 데에 있다. 빠른 곳은 아주 빠르게 몰아서 치고, 일반적으로 천천히 치는 부분에서 더 천천히 연주함으로써 흐름에 긴장감을 준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결과 낭만주의적 피아니즘의 발현일 수 있고, 본인이 좋아한다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코르토를 염두에 두었다면 페달 사용이나 강약 조절 등 '루바토'를 강조한 그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건반의 터치에서도 남다른 개성이 느껴지는데 조심스러운 짐작이긴 하지만, 한국 전통 타악의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전통 음악에 ‘시김새’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녀의 장단과 리듬에서 서양음악의 기법에서는 찾기어려운 특유의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
2010년 2월 한국 매체와의 최초 인터뷰인 오마이뉴스를 보면 임현정은 유학 전 초등학교에서 장구를 배우고 사물놀이를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파리 음악원 시절에 생활한복을 입고 등교를 하기도 하고, 프랑스 사람들에게 국악 CD를 들려주기도 하였으며 2002년 노르망디 전국 부문 음악 학위과정을 준비할 때 '서양음악에 존재하는 동양 음악(L'Orient dans la musique Occidentale)'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쓸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음악적 정서와 연주에 어쩌면 우리와 그녀 자신도 모르는 한국 음악의 전통이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임현정의 이번 음반이 여러모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반짝 스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고, 그녀가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걸어온 길과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특이하게 보일 뿐이다. 임현정이 만약 한국에서 예중, 예고, 입시 제도를 거쳐 음대에 진학하고 유학길에 올라 콩쿠르를 통해 데뷔하였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서양 음악에 매진하느라 꽹과리, 장구 한 번 만져 볼 일 없고, 철학, 문학, 역사, 미술과 거리가 먼 채 ‘스탠더드’를 향해 나아갔다면 지금의 임현정이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을 우리가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온실의 화초로 다듬어지고, ‘관리’된 것이 아니라 거친 바람, 폭풍우를 헤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달려온 건강하고 씩씩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여기 있다. 음악에 표준이 있고, 예술은 세월의 원숙함을 통해 완성된 것만이 진짜라고 믿거나 생애 최초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들으려는 분들에게는 임현정의 이번 음반이 비싸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분들은 권위가 인정된 역사적인 명연주들을 찾아 듣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새로움(novelty)이란 얼마나 좋은가? 20대엔 20대의 사랑과 열정, 슬픔과 고독이 있다. 피아노의 신약성서라 불리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에는 인생의 다양한 감정과 사상이 담겨 있는데 임현정은 젊은 열정과 몰입으로 20대의 베토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웬만하면 다 들어보았고, 집에 CD 한 두 장은 있을 만큼 익숙하게 ‘안다’ 할 수 있는 ‘비창’, ‘월광’, ‘열정’ 소나타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번 음반을 들어볼 가치가 있겠다. 더구나 타고난 천재성에 특유의 에너지, 기교, 인간과 예술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한 젊은 음악가의 연주라면.
임현정의 연주와 표정, 인터뷰를 보면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2012년 8월, 블로그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