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헨릭 셰링,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봄이 올 때까지는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 안도현
'待春賦'라는 고전적인 장르가 있다지요.
겨울의 무채색이 지겨운 시인묵객들이 봄을 기다리며 쓴 시와 문장..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크로이처>를 듣습니다. 폴란드 출신 두 대가,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연주입니다.
당시 셰링 38세(1918-1988), 루빈슈타인 70세(1887-1982), 50년도 더 된 연주라 당연히 모노럴 녹음이지만, 우아함과 격조가 느껴지는 명연입니다. 노장과 청년의 호흡도 참 좋습니다.
CD 재킷이 재미있습니다. 보통 소나타 음반은 기악 연주자가 메인으로 등장하죠. 피아니스트는 반주자이므로 '보조'처럼 나오는데 반해 이 앨범은 Artur Rubinstein의 독집으로 착각할 만큼 그의 이름이 크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작곡자 L.V. Beethoven보다도. 물론, 루빈슈타인의 팬과 고정 고객이 많다는 것을 감안한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 이유를 CD 내지 설명에서 찾았습니다. 야샤 하이페츠,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함께 20세기 명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Henryk Szeryng. 그를 세계 클래식계에 소개하고, 꾸준히 '밀어준' 사람이 바로 루빈슈타인입니다.
셰링은 바르샤바 근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바이올린을 시작해 독일에서 당대의 대가 Carl Flesch에게 배웠고, 프랑스에서 Jacque Thibaud를 사사했습니다. 엄격하고 지적인 독일-헝가리 스타일과 우아하고 낭만적인 프랑스-벨기에 스타일을 양수겸장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한편으로는 Nadia Boulanger에게 작곡을 배우고, 소르본느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할 만큼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은 이 전도유망한 청년의 인생을 전혀 다르게 인도합니다. 6개 국어에 능통한 애국주의자 셰링은 폴란드 망명 정부에서 연락 장교로 일했고, 폴란드 난민 이주계획을 위해 멕시코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 현지 음악가들과 교류한 인연으로 멕시코 국립음대에서 교편을 잡아 영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1954년 Artur Rubinstein을 만납니다. 루빈슈타인이 멕시코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한 것이죠. 이 CD에 따르면, 연주회가 끝나고, 셰링은 무대 뒤로 찾아가 감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며 폴란드어로 ‘내 생애 이런 연주는 처음입니다'라고 말하고, '아버지뻘'인 루빈슈타인을 끌어안았다고 합니다. '고향 후배' 셰링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루빈슈타인은 호텔로 그를 초대했고, 셰링은 거기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오디션인 셈인데 내공이 어디 갔을까요? 젊은 셰링의 가능성과 실력을 한눈에 알아본 루빈슈타인은 그를 미국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당대의 명사, 음악가, 에이전트들에게 셰링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후로도 루빈슈타인은 셰링의 후견인으로 세계 주요 무대에 그를 소개하면서 많은 연주와 음반을 남겼습니다. 독주회는 물론, 실내악 분야에서도 두루 활약했는데 루빈슈타인, 셰링, 피에르 푸르니에 브람스 3중주는 지금도 명연주로 손꼽힙니다. 루빈슈타인이 아니었다면, 아니, 1954년 멕시코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고전에 충실한 셰링의 연주를 만나지 못했을 수 있었겠지요.
1958년 12월 31일 한 겨울 뉴욕에서 녹음했다 하니 이 연주도 타향살이 신세 폴란드 음악가들의 '대춘부'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CD를 1996년 1월 미국 서부 작은 도시 Davis의 한 음반가게에서 만났습니다. 유서 깊은 UC Davis가 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학생과 교직원이 2만 명 넘게 사는 대학 도시이다 보니 고서점, 중고 음반 가게가 많아서 주말마다 '행복한 순례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 또한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먼 타향에서 이 연주를 들으며 봄을 생각하였던 기억이 나네요.
볕이 좋습니다. 내일은 아이 손잡고 나들이라도 해야겠습니다. (2012년 1월, 블로그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