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드 전형성과 좀비 호러물의 결합
설 연휴 중간중간 시간을 모아 넷플릭스 신작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을 모두 봤다.
1. 우선 길다. 회당 평균 60분, 12회, 총 728분. <D.P.>, <오징어 게임>, <지옥> 같은 넷플릭스 시리즈에 비해서 실제 러닝타임이 길기도 하지만,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건의 전개 속도가 더디기 때문 아닐까?
여러 SNS에 길다, 지루하다는 의견과 함께 심지어 패스트 포워드 기능으로 넘겨가며 시청했다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콘텐츠인 듯. 넷플릭스가 이 드라마를 설 명절 연휴에 맞춰 공개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풀타임 빈지 왓칭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니까.
2. <오징어 게임>, <지옥>이 영화의 변형이라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드라마의 확장이다. 한국 드라마의 전통과 관습에 충실하다. 영화가 사건 중심이라면, 한국 드라마의 서사는 이에 못지 않게 인물 간 관계 형성, 감정의 구축과 발전을 중시한다.
좀비 출현이라는 느닷없는 재난 앞에 고립된 효산고 아이들은 같은 반 급우였을 뿐 별다른 소통이 없던 사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는 동안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고 마침내 전우와 혈맹이 된다. 엮일 일 없을 것 같았던 미진과 양궁 선수 하리도 마찬가지.
감독과 작가는 유혈이 낭자한 좀비와의 사투, 아비규환뿐 아니라 고교생 청춘들 사이에 생겨나는 새로운 관계 형성, 감정의 발전 과정을 천천히,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때 사건 전개는 멈추고, 극적 긴장은 이완되며, 스토리는 늘어지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꽁냥꽁냥 달달한 로맨스 장면이나 기억에 남는 명대사들은 대체로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3. 넷플릭스는 <지금 우리 학교는>을 호러 좀비물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 작품은 학원물이기도 하다. 군대, 경찰, 소방 같은 국가 권력도 감당하기 힘든 초현실적 재난에 맞서 싸우는 십대 청소년들의 성장 스토리다.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언제 좀비가 될지 알 수 없는 공포와 구조되지 않는다는 폐쇄와 고립. 이 절망스런 고통 앞에서 마음을 열어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나 아닌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천천히 드러난다. 여기 더해 풋풋한 연애 감정까지.
입시에 매여 공부만 한 아이들이 무엇을 할까 싶지만, 이들은 지혜를 모으고, 배운 지식을 활용해 드론을 띄우는가 하면 방송을 하고, 스크럼을 짜서 좀비에 맞서 싸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용감하다.
7화 ~ 10화는 어른들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끼리 갈등하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파리대왕>, <아이들만의 도시> 같은 작품의 재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4. 할리우드 사람들이 꼽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 특징은 인물 간 관계의 구축(building relationship), 섬세한 감정 표현이다. 스릴러, 의학, 역사, 수사물 등 여러 장르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고 있지만, 한국 드라마의 대표 장르는 누가 뭐래도 로맨스. 감정을 쌓고, 표현하고, 관계를 천천히 발전시키는 재미 창출에 탁월하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드라마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멜로와 신파까지 담고 있다. 우리는 지겨운 클리셰를 반복한다고 할 수 있으나 글로벌 팬들은 호러, 좀비물에 청춘, 학원물 성장담을 버무린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미국 영화 전문 매체 filminquiry.com의 기사 제목은 ‘All of Us Are Dead: An Emotional Zombie Invason’(지금 우리 학교는: 감성 좀비의 습격)인데 “좀비가 등장하는 호러물에서 예상할 수 있는 피칠갑, 폭력 장면과 함께 등장인물 간의 새롭고 오래된 관계에서 비롯된 뜻밖의 깊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고 평했다.
5.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필름몬스터 by JTBC 스튜디오, 김종학 프로덕션이 제작했다. 드라마 동네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얘기다.
영화 <역린>, <완벽한 타인>을 필모그래피에 올린 바 있지만 이재규 감독은 MBC에서 연출한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로 먼저 유명해졌다. 천성일 작가 역시 드라마 <추노>를 집필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오징어 게임>, <지옥>처럼 영화 동네 사람들이 만든 작품보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진한새 작가, 김진민 감독)과 동류항으로 묶을 수 있겠다. <인간수업>도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러고 보니 김진민 감독 또한 MBC 출신. 두 작품은 여의도, 상암동 텔레비전 드라마 전통과 관습에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맞는 스토리, 장르와 표현을 더한 새로운 스타일의 콘텐츠라 할 수 있다.
6. <지금 우리 학교는>은 호러 좀비물의 장르적 쾌감으로 중무장했으나 멜로, 로맨스, 신파까지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 또한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사건의 빠른 전개, 해결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캐릭터 각자의 배경과 성장 서사, 등장인물 간 관계 형성, 감정의 구축, 발전을 스토리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 한국 드라마의 컨벤션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물론, 캐릭터와 세계관을 바탕으로 여러 시즌에 걸쳐 확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글로벌 시장 지향 콘텐츠이기도 하다.
2022년 2월 2일 현재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58개 국가에서 TV쇼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지구촌 팬들은 이 작품의 어떤 지점을 즐기는 것일까? 코로나19, 학교 내 집단 따돌림, 총기 사건 같이 여러 나라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 외에도 한국 드라마의 전통과 관습, 장르 혼종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