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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Aug 20. 2020

산봉우리가 아름답다는 것

마테호른 체르마트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체르마트로 가기 위함이다. 평소에는 늦잠이 기본이던 나도 여행만 오면 아침형 인간이 자동으로 되어버리는 마법과 같은 일. 인터라켄 동역으로 향한다. 아직 열차가 오기까지 시간이 있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한국인 할아버지가 오신다. 외국에 가면 굳이 말을 해보지 않아도 얼굴에 한국인이라고 쓰여있는 게 보인다.  

"여행 중이야?"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건네셨다.

"네 배낭여행하고 있어요."

"몇 살이야?"

"저희 스물한 살입니다."

"아이구 어린 친구들이 멀리도 왔네. 아침은 먹었어?"

마침 아침도 굶고 (사실 시간이 없기보단 호스텔 조식이 비싸서 먹지 않았다.) 나온 우리에게 반가운 질문이었다. 먹지 못했다는 우리의 말에 할아버지는 가지고 계신 청사과와 토블론을 꺼내 주신다. 아주 감사한 분이셨다. 덕분에 기차에서 먹을 식량이 생겼다. 그리고 뒤이어 꺼내신 물건에 웃음이 지어졌다. 바로, 팩소주였다.

"이거 한국에서 어렵게 가져온 건데, 하나 가져"

평소에 술을 즐겨마시는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아, 낮에는 먹으면 안 된다~" 웃으며 농담을 건네신다. 자신을 대학 교수라고 소개하며 스위스에 출장 오셨다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우리에게 스위스에서의 첫 아침을 (그 전날에도 아침은 걸렀으니까) 건네주고 떠나셨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을 들고는 체르마트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체르마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할아버지가 준 아침을 먹기 전


기차를 타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오늘 융프라우에 올라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동시에 체르마트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행히 체르마트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가 떠있을 때 빨리 마테호른으로 올라가야 할 것만 같다. 배낭을 처리해야 하는데, 다행히 유로 보관소가 있다. 숙소까지 이동할 시간이 부족해서, 하마터면 마테호른까지 15kg나 되는 가방을 메고 올라갈 뻔했다. 보관소 옆에 스키 보관대도 있는 걸 보니, 여기서도 사람들이 겨울 스포츠를 참 많이 즐기는구나 싶다. 마테호른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오르기로 한다. 적당히 마테호른이 잘 보이면서, 가격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적당하다는 가격이 10만 원이긴 하지만, 이곳 물가에 비하면 적당한 수준이라 생각되곤 한다. 이틀 만에 기차값으로만 30만 원이라...... 이 정도면 악명을 떨치는 수준이다.


고르너그라트로 가는 기차에서 한국인 노부부 여행자를 만난다. 그들은 우리를 부러워했는데, 이유는 단연 '젊다'라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옛날에는 꿈도 꾸기 힘들었다고 하신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해외여행의 문턱이 낮아진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씀이시다.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세대가 아닌가. 체르마트의 절경을 바라보며 그들은 "여기도 엄청 아름다운데, 여기보다 더한 곳도 있어. 캐나다에 가면 로키 산맥이라고 있거든? 거기가 여기보다 더 크고 아름다워. 나중에 거기도 꼭 가봐." 할아버지가 하는 말씀이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보는 마테호른은 하얗다. 전망대는 눈이 없었는데, 마테호른에는 만년설이 쌓였나 보다. 다른 산은 보고 또 봐도 '이쁘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마테호른은 그냥 평범한 산이 아닌 듯하다. 봐도 봐도 이쁘다. 마테호른이 세계 5대 미봉 중 하나인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미봉이란 존재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수많은 봉우리 중 하나겠지만, 어떻게 저렇게 산봉우리가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쉬운 건 구름이 걸려서 좀처럼 걷히지가 않는다. 비가 간혹 오는 날씨여서일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라지만 마테호른이 참 아쉽다. 

트레킹 도중 꽃과 함께 찍은 마테호른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3대가 덕을 쌓으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루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하는데,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설악산 대청봉에서의 일출, 독도 땅 밟기 이런 것들이 있는데, '구름 없는 마테호른 보기'도 나중에 알고 보니 그중 하나였다. 

'그래. 대청봉에서 일출도 봤고, 독도 땅도 밟아봤으니, 이번에는 한 번 양보하자'-라고 생각하며 위안 삼았다.


융프라우에 신라면이 있다면, 마테호른에는 진라면이 있다. 도대체 왜 한국 라면을 여기저기서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오늘도 라면으로 점심 해결이다. 



고르너그라트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이곳 야외 테이블에서 보면 마테호른이 직방으로 보이는데, 이곳에서 커피 한 잔 해버리면 천국에 온 기분을 간접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망상도 해본다. 커피 한 잔 가격이 그만큼 장난 아니겠지만 말이다. 


전망대 뒤편에서 마테호른을 상대로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외국인에게 나와 친구의 사진을 부탁하는데, 열심히 찍어준 사진을 보니 아주 엉망진창이다. 기울어져있고, 한쪽에 몰아져 있고, 허리에서 잘려있고 가관이다. 이래서 괜히 한국인이 사진 제일 잘 찍는다고 한 게 아니구나. 


고르너그라트에서 구름이 걷히지 않아, 그대로 트레킹을 하러 내려간다. 마테호른이 잘 보이는 리펠제 호수까지 트레킹을 한다. 맑은 날씨 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걷는 트레킹. 나를 둘러싼 거대한 봉오리들에 압도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쾌함. 

리펠제 호수에서 보이는 마테호른. 구름이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막상 리펠제 호수에 도착해서 반영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지만, 바람이 불어 쉽지가 않았다. 잠시 바람이 멈추는가 싶더니, 저 멀리서 외국인 친구들이 옷을 벗고 호수에 뛰어든다.

"첨벙"

물소리를 내며 잠잠해지던 호수에 다시 물결이 친다. 실패다. 내 반영 사진을 방해한 녀석들이 밉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기서 수영을 할 생각을 한 그들이 대단했다. 남녀 불문하고 호수에 뛰어든 그들, 여기서 수영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쌀쌀한 날씨에 걱정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물이 그렇게 깨끗하진 않아서 막상 뛰어들고 싶진 않다. 그들은 더러운 물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상관 쓰지 않는 것인지......


전망대에서 만났던 체코 직원은 여행 왔다가 너무 매료되어 아예 눌러앉았다고 말했다. 언제 보든 질리지 않는 풍경과 작고 청정한 도시 때문이라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집값과 물가가 비싸서 그렇지. 체르마트 어디에서든 거대한 마테호른을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별빛과 함께 마테호른을 맞이할 수 있고, 이른 아침이면 황금색으로 물든 마테호른을 맞이할 수 있다. 언제 보아도 예쁜 마테호른인데, 각양각색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축복받은 삶일까. 


마테호른을 보면서 처음 느낄 수 있었다. 올라가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있구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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