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 융프라우
스위스는 아주 잠깐 들리기로 했다. 그렇게 이동 시간이 길지도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물가가 워낙 비쌌기 때문이다. 숙박비도 비쌌고, 열차 티켓도 무지하게 비쌌다. 식비가 비싼 것도 당연한 얘기였다.
스위스에도 많은 볼거리가 있다. 하지만 스위스는 알프스가 지나가는 나라였기에, 다른 곳보다 알프스가 중심이 되는 도시를 들리고 싶었다. 그렇게 인터라켄과 체르마트만을 가보기로 미리 계획을 했던 것이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 넘어온 인터라켄은 자연 속의 도시와 같았다. 우리나라의 시골과는 다른 느낌의 자연임이 확실했다. 알프스 아래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인터라켄의 거대한 호수를 지나쳐 도착한 기차역 인근부터 많은 겨울 스포츠 장비점이 즐비해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인공으로 만든 스키장만 보다 보니, 이런 실제 만년설에서 스키를 탄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스위스 아니랄까 봐, 관광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명품 시계 브랜드도 하나씩 눈에 보였다.
여행에서 날씨는 아주 중요한 변수임이 틀림없다. 오랜 기간 도시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날씨 운이란 것은 여행객들에게 커다란 운으로 다가오곤 한다. 마침, 내가 인터라켄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 비 소식이 불안 불안하게 낮은 확률로 들려왔다. 융프라우까지 올라가는 산악 열차를 타는 것이 20만 원에 가까운 가격인 것을 생각하면, 단 하루 올라갈 수 있는 기회에 날씨 때문에 망쳐버린다면 아주 속상할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그런 불안한 생각을 품은 채, 새벽같이 일어나 융프라우에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산악 열차 값이 아까워서 융프라우뿐만 아니라 옆 코스인 피르스트까지 보기 위함이었다.
스위스의 새벽 공기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웠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제발 비만 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많을까 봐 미리미리 준비해서 나온 건데 생각만큼 다른 여행객들은 부지런하지 못한 탓일까.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역은 한산했다. 사실 스위스의 빨간 산악열차는 나에게 스위스의 상징과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어디선가 본, 산을 타고 오르는 열차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탓일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비싼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걸 언제 타보나-하던 융프라우행 산악열차를 탄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스위스의 평범해 보이는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나 싶더니, 어느새 기차는 평지를 넘어 산을 타기 시작한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차는 생각보다 흔들림이 없었다. 아주 부드럽게 산을 오른다. 곳곳에 젖소도 보이고 말도 보인다. 사진으로, 그림으로만 보던 풍경들의 향연이다. 이곳에 살면 어떤 느낌일까. 자고 일어나면 펼쳐진 이런 그림 같은 풍경들. 이런 풍경도 살다 보면 익숙해져 버릴까. 나중에 모든 면에서 여유로워졌을 때, 한 달 정도 살아보면 어떨까 싶은 상상을 한다. 겨울은 추우니까 여름에 말이지. 이런 생각을 하며 열차를 두 번 갈아타자, 어느새 캄캄한 터널로 열차는 향했고, 우리는 내릴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코스대로 돌다 보니 어느새 융프라우 전망대가 나왔다. 7월이었지만, 만년설로 뒤덮여 있어서 초겨울 날씨와도 같았다. 한국에는 만년설이 없으니, 아마 내가 밟은 첫 만년설이 아닐까. 융프라우는 top of Europe이라는 타이틀을 자랑했다. 그만큼 의미가 깊었고, 나는 거기가 사실 알프스의 최고봉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실제로는 프랑스의 몽블랑이 최고봉이다.)
높은 봉우리가 곳곳에 솟아 있고 그 사이로는 빙하가 늘어져 있었다. 대단한 경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곳, 융프라우에 올랐다는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치는 맞았다. 융프라우에 걸린 거대한 스위스 국기가 그것을 더욱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스위스 융프라우 하면 유명한 것이 신라면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에서 알프스를 바라보며 먹는 컵라면이라...... 컵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추운 날씨에 특히나 알프스의 대단한 경치를 앞두고 먹는 맛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여권을 보여주면 컵라면 하나를 제공해준다고 했는데, 막상 가니 한국인이라는 것이 이마에 써져있는 건진 몰라도 여권도 없이 바로 컵라면을 받을 수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알프스의 빙하와 만년설을 바라보며 컵라면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확실히 기대를 저버리진 않았다.
융프라우에 내려오는 길에 피르스트에 들려서 간단히 트레킹도 하였다. 피르스트에서 내려오는 길에 트로티바이크도 타면서 알프스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저녁으로 퐁듀를 먹었을 때, 배는 차지 않았지만 먹어본 것에 의의를 두자며 서로를 위로했고, 곳곳에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페러글라이딩은 떠다녔다.
물가가 너무 비싸 먹고 싶은 맥주도 먹지 못했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알프스의 만년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인터라켄은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