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그리고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어!
명절이 또 돌아왔다. 이번 명절은 휴가만 잘 쓰면 열흘 정도 긴 연휴를 맞게 된다. 열흘이면 평소 엄두도 못 내던 장거리 해외여행을 충분히 다녀와도 될 시간이고, 마침 여행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다.
카카오톡 프로필은 수시로 업데이트 한 친구들의 소식이 올라오는데, 누가 어디서 무얼 하며 보내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명절 연휴에 여행이라니, 정말 부러운 친구들이다.
명절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지는 이미 오래다. 명절의 의미가 사라져 가고 점점 간소화되면서 사람들에게 명절연휴는 여행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고 있다. 여행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는 명절 전 날이면 이마트며 재래시장을 종종 대며 차례상 장보기를 한다. 게다가 음식준비를 다 마치고 나면, 그날 저녁은 10명 정도 손님들을 위한 식사 준비도 해야 한다.
시어른들 두 분 다 돌아가신 뒤로 맏며느리는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떻게 부모님 제사를 안 지낼 수 있냐고 핏대를 올리던 남편은 본인이 작은아들이지만 스스로 부모님 제사를 모시겠다고 나섰다. 내 입장에서는 처음엔 당황스럽고 과연 남편이 제정신인가 싶었는데, 일 년에 두 번 제사 지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남편을 낳아주신 분들이고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였으니 밥 한 그릇 못 지어 올리겠냐 싶었다.
결국 일 년에 두 분 기일 따로 지내고 , 설과 추석까지 정확히 4번은 음식준비를 해야 한다. 시간이 거듭할수록 익숙해져서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장보기부터 상을 차리고 치우고, 뒷정리하기까지 엄청난 노동이 문제다.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손가락 마디 관절이 쑤신다. 남편과 아이들이 조금씩 도와주지만 내 노동력이 더 중심이 되니 어차피 내 몫이었다.
이번 추석 전날도 차례음식 준비를 끝내고 저녁 6시부터 어김없이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총 12명. 우리 가족을 비롯, 사촌 시동생, 큰집 장조카, 큰집 조카 아들, 사촌시동생 자녀들까지. 나열하고 보니 가까운 촌수도 아닌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집으로 모이게 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같이 본가 쪽으로 갈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지간에 뿔뿔이 흩어지고, 명절인데 찾아갈 곳이 없어서 우리 남편한테 우리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물어본 일이 계기가 되었다. 남편이 그들보다 형이고 내가 형수니까 거절하기 힘들었다. 명절 음식 준비 끝내고 편히 좀 쉬어볼까 했는데 불쑥 들이닥친 불청객이란 생각에, 나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왠지 억울한 마음에 심통이 났다. 처음 그들을 맞이했을 땐 정말 그랬다.
다음 명절에도 그다음 명절에도 명절 하루 전 저녁 6시면 늘 찾아왔다. 손님으로 처음 올 때보다 선물도 더 신경 써서 사 오고, 가끔은 주방 어딘가에 돈봉투도 슬쩍 올려놓고 가고, 맛있는 한우도 사 와서 같이 구워 먹고, 한 번은 형수님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명품향수도 선물로 사 왔다. 다 함께 먹는 음식의 메뉴가 다양해지고 마시는 술병도 점점 늘어나서 이번 명절엔 12명이서 대략 소주 30병 정도는 마신 것 같다. 신기하게도 모두 애주가들이다.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얼굴들을 마주하고 끝없이 수다를 떨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나름 흐뭇했다. 모두 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같은 집안 친척들끼리 모이는 게 너무 그리웠다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는 시끌벅적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세대교체가 되어 이제는 그 중심에 우리가 있다. 지금처럼 만나지 않으면 그 맥은 쉽게 끊어진다. 사촌끼리도 얼굴 볼 일이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친척들이 오히려 고맙기도 했다. 덕분에 명절에 명절다운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이제는 나도 좋다. 다음 명절에는 또 어떤 음식을 준비할까, 소주는 또 얼마나 넉넉히 사둬야 할까 벌써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가족끼리만 단출하게 보내는 명절도 좋지만, 내가 좀 힘들어도 시끌벅적한 명절도 좋다. 그래봐야 일 년에 두 번이다. 설에 한 번, 추석에 한 번. 몇 년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자칫 대면대면할 뻔했던 관계가 많이 가까워졌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잘살다가 이야기보따리 하나씩 들고 반가운 얼굴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추석도 승길이 삼촌, 승만이 삼촌, 영남이 조카, 재민이, 진영이, 진우,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내년 설에는 우리 아이들이 2차로 꼭 노래방을 가자고 하네요. 노래 몇 곡들도 준비해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