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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퉁이극장 Oct 28. 2022

타임 패러독스와 맨발의 퇴고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를 보고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서하나


*이 글에는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글을 쓸 때 퇴고가 가장 힘들다. 처음 뻗은 방향대로 가고자 하는 고집과 관성이 강해서일 수도 타고난 게으름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두려움. 퇴고는 백지와는 또 다른 무궁한 공포니까. 문장과 문장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수백 수만의 평행 우주를 파괴하고 묵인하는 일. 최선은 뭘까? 뭘 덜어내고 뭘 더해야 할까.


‘썸머 필름을 타고’라는 영화의 포스터 왼쪽 상단에는 작은 글씨로 ‘우리의 청춘은 걸작이다!’라는 카피가 적혀있다. 관람이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겨우 발견한 문구였다. 걸작이란 뭘까? 아름다운 눈빛과 액션을 수행하는 배우를 섭외하고 최적의 장소에서 풍족한 예산으로 만들어 내는 영화일까. 아니면 열악한 환경, 고난과 역경 같은 클리셰들을 극복! 이글거리는 에너지와 열정을 다 바쳐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혹은 다 필요 없고 역사에 길이 남을훌륭한 결과물일까. 이 영화에서 ‘걸작’의 의미는 결국 끝까지 퇴고하는 용기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끝이라고 할 때까지 고쳐보겠다, 변화에 대응하겠다, 승부를 보겠다.’ 라는 일종의 장렬한 고백.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맨발은 청춘답게 여러 가지 심리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청춘답게라니. 주인공이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는 걸 들었다면 진저리쳤을 것이다. 로맨스 따위 오글거린다고치부하고 사무라이 영화에 심취해 액션사극을 찍고 싶어 하는 인물. 그가 자신이 쓴 극본 ‘무사의 청춘’에 꼭 맞는 미래인 킨타로를 만났을 때 사활을 거는 모습. 진부하지만 ‘청춘의 표상같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이 표현도 싫어서 컷! 컷! 을 외칠 것이다.) 생의 엔트로피가 가장 진하고 뜨거울 때, 흘러넘치다 못해 쩔쩔 끓어서 그 에너지가 시간의 총량마저늘여놓을 때.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지금의 하루와 그 때의 24시간은 달랐던 것 같다. 쪼개고 나누고 감각하고 집중했었던 희미하지만 단단한 기억. 섬세한 형태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하얗게 빛나는 자리. 청춘은 성급하게 감느라 열어본 필름사진기 속 필름 같다. 타버린 필름이 하

얗게 변한 아이러니. 청춘이라고 불리는 그 때가 결국 삶의 형태소를 이룬다는 불우한 진실은 변함이 없고 영화는 시간을 달려간다.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고 미래로 연결하기 위하여. 마치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영화의 또 다른 특이점은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청춘은 이래야지 하고 끈기 있게 웅변하지만 그 모습이 꽤 어설프고 서툴다. 그래서 아름답다. 견고한 설계나 은유 없이 무고한 사랑을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현해야 영화 아니냐고 묻던 주인공이 클라이맥스에서 결말을 고쳐 버리고(퇴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인을 향해 검을 겨눈다. 남녀의 진검승부를 로맨스로 승화시킨 수많은 무협 걸작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지만 오마주라고는 도무지 봐줄 수 없는 깜찍한 엔딩. 청량하다. 주인공 맨발이 좋아한다고 검을 휘두르면 킨타로도 검을 휘두르며 좋아한다고 응수한다. 꽉 닫힌 결말은 상쾌하고 난데없다. 검은 엔딩 크래딧 뒤로 흐르는 총천연색 맨발의 삶을 상상하자면 십대의 일상이 대부분 그러하듯 특수효과 없이도 자주 심각하고 잘 웃을 것이다. 덕분에 시간은 역류하지 않고 맨발은 유연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처럼 퇴고 앞에 망가진 어른이 되어 망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무릎 써 본 사람은, 타인의 배려와 기대를 받아 본 사람은 넘어질 수는 있어도 망가지지는 않을 거라는 환상. 나는 이 영화의 장르를 퇴고 판타지라고 기억할 것 같다. 세 번이나 결말을 바꾸는 것은 용기 그 자체. 퇴고야 말로 타임패러독스를 각오하고 휘두르는 검 같은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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