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리뷰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을 ‘인비올라타’에서의 라짜로는 ‘행복한’ 라짜로였을까. 깨어난 뒤 현대 도시에 떨어지게 된 라짜로는 ‘행복한’ 라짜로가 맞을까. 부당한 현실에 길들여진 채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를 터다. ‘메리 배드 엔딩’이라는 말이 있듯 상황의 한가운데에 놓인 주인공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것이 행복일까. 대외적으로 행복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본인에게 고통이라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까.
우리가 행복을 매기는 상황은 누군가가 빚어낸 스토리가 아니다. 그 인물의 생이 행복인지 슬픔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행복한 ‘라짜로의 인생’과 행복한 ‘라짜로’는 꾸밈을 받는 주체가 다르다. 다시 말하면, 라짜로는 불행해 보여도 행복했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인 ‘행복한 라짜로’에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인비올라타’의 사람들은 길들여져있다. 개중 가장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은 단연 라짜로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라짜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라짜로가 바보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런 부당한 상황에서 온전히 순종하기 때문이다.
라짜로에게는 그 부당한 상황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자, 모든 것에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가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생성된다.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할머니만이 제 핏줄임을 알고 있는 라짜로는 인비올라타의 주민들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며 가족으로 생각한다. 제게 ‘형제’라고 말해주었던 탄크레디조차도 완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라짜로에게 가족이란 무한한 신뢰를 주는 존재다. 즉, 대가 없는 선한 사랑이다. 선한 라짜로는 선한 사랑으로 더러움과 추악함을 밀어낸다. 누구보다 속세에 이용당하지만 속세에 전혀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라짜로에게 당연하게도 신은 손을 들어준다. 절벽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않으며, 버려진 채였음에도 굶주린 늑대에게 물리지 않았고, 성당의 오르간 소리가 따라오는 경험들은 신이 선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라짜로에게는 신이 부여한 새 시간이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나이 먹지 않은 채로 미래에 던져진다. 꼭 야생 늑대가 도시 한가운데에 버려진 듯하다. 선한 라짜로는 그렇게 신의 선택을 받고서 최선을 다해 상황에 적응하고자 한다. 라짜로는 가족과 함께라면 ‘인비올라타’든 아니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안토니아라는 인물은 선과 악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라짜로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나 고마움을 느끼고, 라짜로와 다소 비슷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짜로를 주저앉히려는 악함 사이에서 라짜로의 팔을 붙잡고 있는 유일한 사람. 라짜로를 유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한 불법적 행동에 라짜로를 관여하지 않도록 하는 부분이 그렇게 느껴졌다.
라짜로의 인생은 불행하다.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힘을 썼지만 그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비올라타를 빠져나온 뒤 돌아간 ‘가족’들에게는 찬밥 신세다. 필요한 부분만 싹둑싹둑 잘라가는 ‘가족’이라는 그룹에서 라짜로는 얻는 것이 없다. 그러나 라짜로는 행복하다. 라짜로는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을 믿고 사랑하기에 함께하면 전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인다. 영화에서는 절제된 감정 표현을 보여주지만 라짜로가 감정으로 동요하는 부분은 두 번으로, 한 번은 눈물까지 보인다. 어쩌면 절제된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라짜로의 감정상태가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행이 전혀 깃들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라짜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불행하다고 여기지만 라짜로에게는 자기 연민의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배경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신력인지는 알 수 없다. 순수하고 깨끗한 표정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변화는 누군가에게 불행이 될 수 있다. 변화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안주하는 고통보다 변화의 두려움이 더욱 크다. 인비올라타의 사람들이 상황에 안주하였던 것은, 변화라는 선택지가 너무나도 불확실하고 두렵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도 인비올레타의 주민들이 아주 얕은 시냇가를 건너기 두려워하는 장면이었다. 무지에 의한 변화의 선택지 소멸을 잘 보여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라짜로는 착취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다. 그는 변화하지 않는 그 삶에서 적응하며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 그것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행복은 깨지겠지만, 끝까지 모른다면 그것은 행복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행복은 그래서 주관적이다. 누가 뭐라고 한들 본인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래서 사람은 알면 알수록 불행해진다. 끝도 없는 불행은 알면 알수록 밀려오고, 그에 대한 해결책은 무겁고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사람이 자꾸만 알고자 하는 것은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방책이다. 세상은 참 모순적이다.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지만, 행복은 발굴할수록 심연 속의 개념이 된다.
담배를 판매하는 후작 부인은 ‘담배’가 건강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자본가는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대중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이다. 인비올라타는 지금 현대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작게 줄여둔 것 같다. 일해도 빚만 늘어가는 소작농들의 상황, 그리고 이를 주동했던 자본가는 더 큰 현대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소작농이다. 세상은 자본에 지배되어 있고 빈익빈 부익부는 여전히 심화되고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현대사회에서 중세적인 문화를 잇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 현재로 떨어졌을 때의 모습, 그리고 완전히 선한 존재가 선택한 것들까지도 충격의 연속이다. 자본주의의 비판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는 영화였지만, 나에게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의존적인지 떠오르게 되는 영화였다. 행복이 의존적인 이유는, 인간이 오로지 혼자서 행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짜로가 행복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가족에 대한 대가 없는 사랑,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탄크레디를 마주친 그 순간 그를 환하게 반길 수 있었던 것도 라짜로가 그를 형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누군가에 의해 생긴 욕구가 채워지면 만들어진다.
러닝타임이 상당히 길었음에도 집중하기가 좋은 영화였다. 신선한 각본, 그리고 라짜로를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상황과 그에 대한 감정의 흐름도 압도감이 있었다. 주인공이었던 라짜로의 마스크는 각본과 연출을 극대화하는 순수함이 있다.
라짜로는 행복하다. 나는 그런 행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부수어야 할 잘못된 것들을 부수는 것 또한 원하기 때문에, 계속 알고자 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고 싶어진다. 완전한 선함을 보여준 라짜로는 현대사회에서 선함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알아갈수록 점점 더 행복과 가까워지기 어렵겠지만, 나는 그 행복을 찾기 위해 안정적인 의존처를 찾아내고 행복에 더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것이다. 대가 없는 사랑을 하는 라짜로는 바보 같지만, 마냥 바보는 아니다. 왠지 지금의 나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럽다. 그 단단함과 안정이.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최현지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