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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경계를 넓히는 것. 도움이 폭력이 되는 순간

[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리뷰

by 모퉁이극장

뚜벅이었던 친구가 차를 뽑은 날, 친구는 더 이상 버스를 탈 수 없게 되었다. 자가용의 편리함을 알게 된 후 대중교통의 기나긴 덜컹거림이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세상엔 알게 된 후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행복은 만족(滿⾜). ‘가득 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견문이 넓어질수록 내가 알던 세상의 경계는 더욱 커지게 되고, 기존의 ‘나’와 멀어진 그 경계 사이로 슬픔이 스며든다. 바램이 생기면 결핍이 생기고, 결핍이 생기면 슬픔이 생긴다. 라짜로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마지막에야 눈물 흘렸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라짜로는 어떤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까’였다. 한 사람의 세상은 그가 배운 것으로만 구성된다. 조카에게 ‘삼촌 몇 살 같아 보여?’라고 물어보면 조카는 손가락 10개를 펴 보이며 대답한다. 조금 머리가 커진 저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35살이나 40살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어린 조카에겐 가장 커다란 숫자가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10이기 때문이며, 저학년 아이들은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어른’의 나이가 자신의 부모님의 나이인 35~40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늙어 보여서는 아니길 바란다. 아마도. 제발.) 나 또한 군대를 가기 전에는 군인들이 모두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25살이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아직 배우지 못한 아이들의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배움의 정도에 따라 각자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달라지게 된다. 과거 동서양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시민들의 교육을 통제시켰던 것엔 이유가 있다.


마을에서 어느 순간 등장해 가족도 없이 묵묵히 일을 하고 있던 라짜로는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어떤 모습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라짜로가 영화에 나온 것처럼 범인(凡⼈;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난 그의 특이점은 극단적으로 배움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된 대로만 행동하는 아니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 누군가 그

에게 ‘사람은 늙고,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라고 알려주었다면, 아마 그 또한 늙었을 것이며, 절벽에서 떨어진 순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의 세상은 ‘사람을. 내 가족들을 돕는다.’ 만이 법칙이자, 세계의 경계선이었을 것이다. 아마 마을에서 그렇게 교육받아 왔으리라. 이가 그들의 호의였는지 악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의 경계선까지 가득 찬 만족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던 차별

과 따돌림, 과한 대우들 사이에서도 그는 행복할 수 있었다.


이는 인비올라타 주민들 또한 동일했다. 물론 그들은 범인이기에, 삶에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도시로 가고 싶은 열망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을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기에, 한정된 정보만으로 닫힌 세계관 안에서 살아간다. 본인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그들의 결핍은 전구가 부족해 밤이 어둡다는 것,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 정도에 머무른다. 이미 경계선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며 이를 넓힐 수 있는 수단조차 없기 때문이다. 마치 오랫동안 뚜껑이 막힌 컵 속에 갇혀 더 높이 뛰는 것을 포기한 벼룩처럼 그들의 세계는 확장하지 못한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의 안주가 도시의 경찰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발견된 날 마을 밖으로 나오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온 후 행복했을까? 갑자기 커져 버린 세계. 원래의 경계선보다 훨씬 넓어져 버린 경계선 그 간극 사이로 너무나도 많은 바램과 슬픔들이 스며들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조금씩의 행복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도둑질을 하고 길거리에 난 풀을 뜯어 먹으며 몰래 기찻길 옆에 숨어 사는 이들의 얼굴은 인비올라타 마을의 생기 넘치던 얼굴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이었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던 작고 갇힌 세상에서 벗어난 이들은 커다란 세상에서 소외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을 아직까지 닫힌 세계관 속에 살고 있던 라짜로가 발견하게 된다.


라짜로는 아직도 사람을 돕고 싶어하고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 안에서 만족을 느낀다. 마을 안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돕는다. 하지만 그의 도움은 이미 세상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겐 너무나도 작은 찰나의 행복일 뿐이다. 자신의 상황을 잊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향수에 젖어들게 만들어주는 행복. 이는 결국 넓어진 세계의 경계선과 과거의 모습 사이 간극을 더 뚜렷하게 만들어줄 뿐. 라짜로는 그들에게

추억과 미련.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떨쳐버려야만 하는 과거의 유령이다. 라짜로도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라짜로는 슬픔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 사람을 보며 새로운 감정을 배운다. 바램.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작게나마 그의 경계선 또한 넓어진 것이다. 라짜로는 성당 앞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본다. 한 번도 무언가를 부탁해 본 적 없던 라짜로가 처음으로 스스로 노래가 듣고 싶다 표현한다. 그리고 그 바램이 이뤄졌던 순간, 계속 듣고 싶던 노래가 자신을 따라오던 순간 그는 눈물을 흘렸다.


바램이 생기면 결핍이 생기고 결핍이 생기면 슬픔이 생기지만,


슬픔이 생기면 의지가 생기며 의지로 이뤄낸 결과는 행복을 만들어낸다.


범인이 아니었던 라짜로는 그제서야 이 간단한 공식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라짜로가 은행에 찾아가 돕고 싶었던 것은 공작의 아들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방법이, 확장되지 못한 세계관 안에선 하나밖에 없었을 뿐. 마을로 돌아가 행복을 만들어 가자는 새로운 바램을 가지는 가족들에게 바램을 가져본 적이 없던 라짜로는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로 인해 과거의 유령이 된 라짜로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는 사라짐으로써 마지막까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때론 끊어내야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과자를 건네 줌으로 공작부인과의 관계를 떨쳐내버린 것처럼 그 또한 마을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였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그가 안주하는 행복을 깨버리고 더 넓은 세계로 끌고 온다는 것. 그것은 때론 폭력이 된다. 하지만, 넓은 세상에서 바램을 가지고 결핍을 알아야만, 그 슬픔을 이겨내고 의지로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면, 다만 넓은 세계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을 스스로 이뤄낼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고 도와줘야 한다. 우리에겐 그들의 행복을 깨트렸다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점점 자신의 울타리를 넓혀가며 결핍을 의지로 채워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각자의 라짜로를 끊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도와야 한다.


난 나의 그리고 당신의 도움이 폭력이 되지 않길 바란다.

아디오스 아미고. 아디오스 라짜로.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정상원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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