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세이스트] 행복한 라짜로 리뷰
‘라짜로는 예전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바로 하게 된 감상으로, 인비올라타 마을의 사람들이 도시의 생활에 편입하게 된 후의 생활과 비교해 예전 마을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하게 된 감상이었다. 물론 영화의 의도와는 전혀 빗나간 감상이었지만, 해석을 읽은 후에 이 감상이 어디에서 떠오르게 된 것인지 생각해 보면서 내 틀린 감상이 무작정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비올라타 마을 주민들의 삶은 현대사회의 우리가 보기에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왜 빚을 떠안게 된 건지, 왜 일하는지 진실은 전혀 모른 채로, 그저 순응하고 살 뿐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되고 나서의 이들은 그러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인 도시 속으로 섞여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해 없이 얻게 된 일종의 자유는 그들을 다시 빈곤으로 내몰았다. 후작의 아들이었던 탄크레디는 모든 재산을 은행에 뺏기고, 마름인 니콜라는 일자리를 주선하는 사람으로, 마을 주민들은 사기를 쳐가며 돈을 벌며 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라짜로와 함께 어느 저녁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고 이전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예전 생활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최소한 이전에는 어느 정도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빚이 있었고 매우 열악했지만, 최소한의 생활은 영위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도시 속에서 이들은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사기를 쳐가면서도 돈이 없어 먹을 것을 걱정하고, 부유했던 탄크레디는 점심 식사를 대접하지 못할 정도의 생활이었다. 당장 눈앞의 배고픔을 달래기 급급한 상황에서 라짜로의 등장은 마을 주민들의 처지에서 예전 생활을 그리워하고 지금의 생활이 비록 현대 기준에서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생황일지언정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예전의 생활이 더 낫다고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도시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 나의 눈에 인비올라타 마을의 생활이 더 낫다고 느껴지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 있다고 여겨졌다. 인비올라타 마을의 생활이 비정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의 우리 생활은 어떤 기준에서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느껴졌다. 진정 도시의 삶이자 우리의 삶은 더 나아졌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착취에 대한 의문이 느껴졌다. 마을에서 후작 부인이 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생활이 착취였다면, 거대한 자본 사이에서 지내는 우리의 생활에서도 착취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개개인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자본가들과 거대 자본 사이에서 개개인들은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 최근 들어 주식과 비트코인 열풍이 굉장히 강하게 불었다. 코로나라는 세계적 재난 상황인 점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동안 지속되었던 ‘욜로 라이프’와 같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모으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체념과 포기에 의한 결과물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주식과 비트코인을 통해 노동을 통한 적은 월급 대신 부가적으로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잘 대변된 상황이다. 이러한 착취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아지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이 역시도 거대 자본 앞에서는 무력하다.
영화는 중세 시대의 모습을 띤 인비올라타 마을과 비교해 자본주의 사회는 과연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꼬집고 있다. 과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전히 착취 속에서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본 리뷰는 시네마에세이스트 김다은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