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영어열풍이 불기 전에, 미취학생인 우리에게 ABC를 가르친 건 할머니였다.
선견지명이라기보다 머리를 놀리는 걸 볼 수 없었나 보다.
한문에 까막눈인 나를 보고는 혀를 차신다. 향우회, 체육대회 같은 데서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에 쓰인 한문을 가리키며 읽어보라고 하신다. 내가 헤매면 여지없이 "모르냐? 어찌 그것도 모르냐?"라고 진정 의아해서 물어보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도 똑같은 방법으로 자극하셨다고 함.
활자 중독자라는 말은 할머니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 교회 잡지, 우유 전단지, 글은 뭐든 읽고 이해해야 하는 법. 살림, 정리정돈은 뒷전. 할아버지가 살림에 더 적합했다는 설도 있다.
여자가 애 낳고 살림하는 거 외에 공부하고, 더 넓은 사회활동이 허락된 세상에 태어나셨더라면 어땠을까?
역할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계소득, 행복지수가 달라졌을까?
전문직을 가지고 남자와 비슷한 급여를 받으며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나와 내동생이 할머니와 동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예전에 남녀차별의 비효율성과 낭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능력이 아니라 성별로 차별해서 일어나는 손실은 공동체 전체가 감당하는데 왜 우리모두 손해보고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