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댁에 가면 애써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오래된 물건들이 몇십 년째 버티고 있어서 기억이 자동 소환된다. 수십 년째 버리지 않고, 정리하지 않다 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올법한 집이 된다.
손님이 온면 지정석에 앉아야 한다. 룰이 아니라 방에 엉덩이 붙일 자리가 딱 그 지정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리의 여왕인 엄마는 "정신 사납다"며 할머니 집에 들어가기를 무서워한다. 올 때마다 잔소리하는 며느리가 부담스러운지 할머니는 주로 외식하자고 하고, 집에 들어오라고 안 한다고 한다. 모든 물건이 전시되어있으니 할머니 집은 박물관 같다. 어느 게 매일 쓰는 물건이고, 어느 게 손 안된 지 10년도 더 된 물건인지는 쌓인 먼지로 단박에 알아본다.
내가 엄마랑 동행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연히 외식하고 할머니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 플러스 2명이어서 할머니는 본인 요에, 엄마는 손님 지정석에 (원래 내 자리), 난 서열에 밀려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여름이면 할머니가 여기 앉아서 주차장을 구경을 하고, 내가 왔다가 가면 옆 건물 뒤로 사라질 때까지 이 베란다 의자에 앉아 지켜본다.) 베란다 의자 옆에 있는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집어 들었다. "이 세숫대야랑 나랑 누가 더 오래됐어?"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아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을 거라고 한다. 올해 난 마흔이다.
25년 전에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지방에서 살던 주택 팔고 셋째 아들이랑 큰 아파트에서 합친다고 광역시에 같이 따라왔던 할머니의 세숫대야. (아파트에서는 세숫대야 쓸 일이 별로 없는데). 같이 이사 왔던 아들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할머니는 소위 말하는 독거노인이 됐다. 사람도 가고 시절도 바뀌는데 수십 년 된 물건은 어딜 가질 않는다. 쓸모가 있건 없건 사라지지 않고 늘 할머니 곁이다. 짐작컨대 우리 집 같이 늘 모델 하우스 같고, "역사"있는 물건 이라고는 없는 집에 사시라면 할머니는 외로워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