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이씨 暎嬪李氏
아비가 아들을, 사약도 칼도 아니고 뒤주에 가둬 굶겨죽인 전무후무한 비극. 워낙에 쇼킹한 사건인 데다,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이 <한중록>을 남긴 덕에 오래전부터 영화/드라마에서 많이 다룬 소재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유명한 소재인 만큼 그 죽음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고전적으로는 <한중록>을 기반으로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원인으로 보는데,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의 <사도세자의 고백>으로 특히 유명해진(이전에도 이미 논문이 있었는데, 이덕일 소장은 그 논문을 못 봤다고 했다고 한다: 관련해서는 정병설 논문 참조) 당시 노론이 주도하던 정국에서 소론 편이었던 세자를 모함하여 죽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서는 혜경궁이 노론의 딸로서 남편을 배신한 ‘악처’로 묘사되곤 한다. 이 설에 따르면 <한중록>은 혜경궁이 자신 및 본가 풍산홍씨 집안을 변명하기 위해 쓴 것이란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자식까지 낳고 살던 후궁 빙애를 때려죽였고 그 외 때리고 베어죽인 내관/궁인들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한 일탈행위도 만만찮아서, 시전상인들에게 거금을 빌렸다 안돌려주고 여승을 후궁 삼고 심지어 평안도 쪽으로 영조 몰래 유람까지 다녀왔다. 이 모든 행위를 소론파로서 영조와 노론에 반한 사도세자의 역모준비 및 그를 숨기기 위한 ‘연극’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 모양.
관련하여 나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룬 해석에 동의한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 도저히 왕위를 물릴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른 사도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정조)으로 왕통을 잇기 위한 영조의 고육지책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렇더라도 무더운 여름날 좁은 곳에 가둬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처사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물론 먼저 자결을 명령하긴 했고, 사약을 내리거나 처형을 해버리면 ‘공식적인’ 죽음이 되기 때문에 정조의 계승권에도 흠이 생긴다는 점은 이해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비정한 아비로 기록될 것을 알면서도 영조는 왕으로서의 길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들을 죽인 아비들은 종종 있으니까.
흥미롭게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 요절하거나 죽임 당하거나 죽임 당한 ‘설’이 도는 조선의 왕과 왕자들에게는 그 친어미가 없었다. 단종과 인종은 나면서 어미를 잃었고, 소현세자와 경종도 죽을 때 어머니가 없었고, 심지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도 어려서 친모가 죽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에게 권고한 이가 바로 그 생모인 영빈이씨다.
어미마저 아들을 버렸다는 명분을 더하기 위해 영조가 사주(?)했을 수 있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영빈이 왕에게 밀고한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발언사실(물론 영조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이 실록과 영빈행장에 실려있고 한중록에서는 관련하여 영빈이 힘들어했다며 그 고민의 말들까지 전한다. 어쨌거나 어미는 아들을 죽이라 하고 아비는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도세자 죽음의 비극성 그 자체라고 하겠다.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들. 사도세자의 상태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부창부수라고, 영빈은 영조만큼이나 냉혹한 판단을 했다.
‘보통의 아녀자’이거나 ‘평범한 어머니’라면 도저히 하기 힘든 일이다. 영조가 시킨 일이었다고 해도, 죽음으로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빈은 거부하기는커녕, 남들이 쉬쉬하던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하면서 ‘대처분’을 권유하고 나섰다. 물론 “차마 못할 일”이라며 고했으니 멀쩡한 얼굴로야 못했으리라. 나이 마흔도 넘어 얻은, 자신에게도 영조에게도 하나뿐인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지 않은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던 동안의 영빈의 태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시종일관 냉정했던 영조와 같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가, 아니라고 마음 다잡았다가, 세손은 끝내 자기 마음을 모를 것이라며 제 무덤에는 풀도 나지 않으리라 한탄했다는 기록에서 미루어보면.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는 손자인 세손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식사부터 일상을 직접 꼼꼼하게 챙기다가, 공교롭게도 사도세자 삼년상이 끝난 직후 지병인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죽은 뒤에는 사도세자 ‘대처분’을 아뢴 공으로 영조에게 ‘의열義烈’의 시호를 받으며 후궁 일등장례로 대우받았고, 영조는 세손모자에게 영빈의 ‘대의大義’를 누누이 강조했다. 영조 생존 시에는 당연히 세손(모자)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겠으나, 마침내 정조 즉위 후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먼저 아비의 무덤[垂恩墓]을 제대로 정하지도, 돌보지도 않은 할아버지 영조의 무덤은, 그의 유지를 어기고 생전 그가 꺼려했던 파묘지로 정해진다[元陵]. 또 정조12년에는 궁호와 묘호가 같은 전례가 없었다는 상소에 따른 것이긴 했으나 ‘의열궁’ 대신 ‘선희궁宣禧宮’으로 할머니를 칭하게 하니, 아비의 죽음을 결행한 조부모에 대한 손자 정조의 감정을 약간이나마 짐작케 한다.
영빈이씨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행보는 영조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부자지정보다 ‘종사’를 택한 영조처럼, 영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세자의 생모이기는 하나 왕비도 아니고, 사대부의 딸로 태어난 간택후궁도 아닌 한미한 집안 출신의 승은후궁에 불과한 영빈이 어떻게 국왕과 같은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기록에 따라 영빈이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스스로 판단하여 고했다고 볼 경우, 영조의 후궁으로서 사십여 년을 보낸 세월을 통해 파악한 영조의 통치행위 및 성격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던 것 같다(이미선의 논문).
영조는 사람 좋고 싫음이 너무도 선명한 성격이었다 하고, 설령 그게 아니었다 해도 적어도 세자와 세손에 대한 태도가 천양지차였음을 모르는 궁중사람들이 없었다. 무엇보다 영조가 경종독살설이 배경이 된 무신란뿐 아니라 나주벽서사건 등의 역모사건들을 겪었던 점이 주목된다.
<한중록>에서는 영빈의 고변 전날 아마도 역모행위와 관련됐을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영빈이 며느리에게 그 소문을 전하며 영조에게 고변할 결심을 한 편지내용을 전하고 있다. 갈등의 끝은 칼부림이기 마련이고 이미 수많은 사람을 벤 세자가 행여 칼이라도 들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역모행위가 돼버리니, 세자는 물론이고 연좌가 성립되면서 세손을 비롯한 그 아들들의 왕위계승권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 편지를 보낸 다음날 아침에 영빈은 바로 영조에게 가서 고변했다고 하니, 전날의 ‘흉흉한 소문’이 영빈에게는 ‘어미로서 못할 일’을 실행케 한 ‘마지막 낙엽’이 되었고, 영조 역시 오랜 고민을 끝내게 한 충분한 명분이 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조가 영빈으로 하여금 고변케 했다고 할 경우, 영조는 더 나쁜 아버지가 되고 영빈은 좀 더 비극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 했던 조선시대, 특히나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烈女를 권하던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영빈은 심지어 적처도 아닌 한낱 첩실, 그것도 한미한 집안의 궁녀출신에 불과했다. 영조는 남편이기 전에 국왕이었고 영빈은 후궁이기 전에 그의 신하, 아니 종에 가까운 위치였다. 물론 무려 사십 년 가량을 총관후궁으로 있었고 왕세자의 생모였으니 중전 못지않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권세를 휘두르지 않고 늘 조심하고 근신했다는 사관史官의 평이 있었던 만큼 영조를 모시는 데 한 점 소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영빈이었으니, 설령 영조가 시켜서 한 일이었더라도 종국엔 순종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만큼 사도세자의 정신상태가 왕위계승자로서는 부적격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다만 성격 차이에서 비롯했을 부자갈등, 특히 영조가 그렇게나 세자를 질책하지 않았던들 그토록 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빈은 세자를 낳았으나 백일만에 품에서 떼놔야 했고, 어미노릇을 할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여염의 아낙네처럼 품에서 기른 아들이었던들 차마 죽이라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 궁에 깊이 가두거나 차라리 귀양 보내달라, 내가 가서 보살피게 해달라… 그리 애원하지는 않았을까?
며느리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 화평옹주가 난산으로 죽은 뒤 탈상하는 달에 자신이 열여섯 어린 나이로 아들을 낳게 되자[의소세손], 영빈이 기뻐하며 산후조리를 돕는 것을 보고 “옹주는 잊고 좋아만 하니 정情이 박하구나”라고 했다는 영조의 말을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조는 후사의 막중함을 잊은 국왕이요, 딸의 요절만을 슬퍼하는 아비일 따름이다. 반면 영빈은 어미로서의 슬픔보다는 종사를 중시하는 왕실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중히 여겼던 모양새다. 남계로만 이어지는 조선왕실에서, 아무리 국왕이 귀애하는 딸이기로 공주도 아닌 일개 옹주의 요절이, 17대왕 효종의 남자후손[三宗血脈]은 하늘 아래 오직 영조와 세자 둘뿐인 위태로운 상황에서 맞이한 원손의 탄생보다 어찌 중할 것인가.
또한 영빈은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지밀궁녀로서 숙종과 인원왕후를 모셨으므로, 궁에서의 잔뼈가 굵디굵은 궁중여성이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궁녀로 입궁하였으니 숱한 왕실의 일들을, 특히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을 질리도록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궁궐살이에서 살아남아 승은을 입고 왕세자의 어미가 되어 죽을 때까지도 왕의 신임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눈치나 판단력이 보통은 넘었으리라.
영빈이 아들을 죽이라 고변했던 일은 백성들에게도 알려졌는지, 영조 대에 이미 그 무덤을 백성들이 밟고 다녀서 그를 금지했다는 얘기를 읽었다(이미선의 논문). 충격이다.
나랏님이 계신 궁궐은 감히 범할 수 없으니 경계도 삼엄하지 않고 격도 떨어지는 후궁의 무덤에 모여들어 화풀이(?)를 한 것일까. 아니면 왕인 아비는 그렇다 치고 어미가 어찌 자식을 버렸는가 영빈에게만 탓을 한 것일까.
설령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이가 아비가 아닌 어미였기에, 뿌리 깊은 모성신화에 反한 어미였기에 더욱 가혹한 평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 참고자료 -
논문
이미선 <영조 후궁 暎嬪李氏의 생애와 위상> 역사와담론 2015.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 역사비평 2011.
서적
한중록 저자 혜경궁 홍씨 출판 서해문집 발매 2003.11.01
영조와 정조의 나라 저자 박광용 출판 푸른역사 발매 1998.04.29.
사도세자의 고백 저자 이덕일 출판 휴머니스트 발매 2004.03.1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 저자 박시백 출판 휴머니스트 발매 2005.04.11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저자 장영훈 출판 대원사 발매2000.12.15.
영화
사도 감독 이준익 출연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개봉 201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