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만나기로 한 다음날이 되었다.
나는 어떤 얼굴로 아빠를 맞아야 할지 고민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아빠의 말을, 아니 변명을 들어주려고 다짐하긴 했지만 얼마나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엄마는 되도록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나 아빠가 엄마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내가 너무 흥분하거나 할 때만 나서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혹시 엄마가 흥분하게 되면 그때는 내가 말려줘야 한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웃는 것은 엄마의 입꼬리였을 뿐 엄마의 두 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벌써부터 화가 나려고 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띵띵띵띵, 현관 비밀번호가 눌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벽시계를 보니 약속한 오전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으며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찰칵, 띠리리링.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아빠의 발소리, 문이 잠겨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스륵, 아빠가 실내용 슬리퍼를 신는 소리가 났다.
“나 왔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떠서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현관에서 소파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와 다른 한 손에는 음료가 들려 있었다.
“어서 와.”
엄마가 아빠한테 말했다.
“응.”
아빠가 엄마한테 대답했다.
“예빈이 몸은 이제 괜찮은 거니?”
아빠가 나에게 인사하며 가지고 온 케이크와 음료를 소파 테이블에 놓았다.
“예빈이가 좋아하는 가게 거네. 앞접시랑 챙겨 올게.”
엄마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주방으로 가는 동안 아빠는 엄마와 내가 앉은 자리에 비껴서 옮겨놓은 소파 콘솔에 엉거주춤 앉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아빠를 외면했다. 내 모습을 봤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안녕, 아빠.”
나는 마지못해 인사했다. 고개를 아빠 쪽으로 돌리긴 했지만 아빠 얼굴을 보지 않은 채였다.
“으응, 그래. 만나줘서 고마워, 예빈아. …아빠 원망 많이 했지?”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 아빠가 나였으면 두 팔 벌려 환영이라도 했을까? 나는 아빠를 노려보았다. 아빠가 움찔했다.
“예빈아.”
엄마가 케이크를 옮겨 담은 접시들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오며 나를 불렀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흠, 흠흠.”
아빠가 헛기침을 했다. 아빠가 원해서 마련한 자리였지만 아빠 역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아빠가 긴장한 모습을 보니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빠는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살이 더 찌거나 빠지지도 않았고 얼굴빛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리 셔츠가 구겨져있었고 바지도 전보다는 낡아 보였다.
“먹으면서 얘기해.”
엄마가 케이크를 잘라 담은 앞접시와 포크를 아빠와 내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케이크였다. 이 케이크에는 흰 우유가 잘 어울린다. 엄마는 내 앞에 우유잔을 놓아주고 아빠가 사 온 음료를 꺼내 아빠 앞에 놓아주었다. 나머지 음료 하나는 엄마 앞으로 가져갔다. 아마 커피일 것이다.
케이크와 음료 모두 우리 셋이 즐겨가던 카페의 것들이었다. 내가 그곳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해서였다.
엄마는 카페인이 많이 들었다며 초콜릿을 되도록 먹지 못하게 했다. 대신 그곳의 초콜릿케이크는 한 달에 두 번은 먹을 수 있게 허락했다.
나는 포크를 잡고 거칠게 케이크를 조각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일부러 쩝쩝 소리를 내며 케이크를 씹어 삼켰다. 원래는 한입한입 아껴가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실컷 느끼려고 천천히 먹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포크질을 계속했다. 금방 한 조각이 다 사라졌다.
“천천히 먹어야지. 체할라.”
엄마가 우유잔을 내게 건넸다. 나는 우유도 벌컥벌컥 한 번에 마셔버렸다.
“예빈아, 너 그러다가,”
내가 엄마와 거의 동시에 말했기 때문에 엄마의 말은 거기에서 끊겼다.
“말해봐, 아빠. 이혼하겠다는 이유.”
나는 아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침내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