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원의 아파트로 돌아가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종로로 나갔다.
친구와 가기로 했었다는 매운낙지집에서 사장님은 이미 반주를 들고 있었다.
여어, 어서들 와. 시은 씨 반갑네요.
그가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내게 인사했다. 말이 어눌하거나 행동이 굼뜨진 않았으나 얼굴은 이미 불콰했다. 소주가 벌써 세 병째였다.
나야 고마운데 내가 눈치없게 방해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방해는요. 원래도 오늘 같이 뵀으면 좋겠다 생각했었어요. 근데 형님이 약속 있다고 하셨어 가지고.
그러게 말이야.
왜 취소된 거예요?
음… 집에 일이 생겼다고 그러더라고. 그 친구도 되게 안 풀려.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사주려 했는데 그것도 안 되네. …그래 이사는 잘했고?
뭐 이사랄 것도 별로 없었어요. 청소가 문제여서 제가 요한이한테 SOS 쳤죠.
그래 친구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집은 마음에 들던가요?
사장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네. 요한 씨가 너무 깨끗하게 청소를 잘해놔서… 저희 둘 합친 것보다도 나아요. 근데 그렇게 피곤한 줄 알았으면 부탁 못하게 했을 텐데.
놔둬요. 알아서 하겠지. 아직 젊으니까 뭐. 요새 잠을 좀 못 자기는 하는데, 무슨 고민인지.
혹시 연주 때문이냐?
사장님의 말에 진원이 요한에게 물었다.
요새도 매일 와?
아냐아냐. 전처럼 매일같이는 아니고 이틀, 아니 사나흘에 한 번? 점점 뜸해지대. 그러다가 발길 끊어지겠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본인을 위해서.
요한 대신 사장님이 진원의 술잔에 술을 채워주며 대답했다.
뭐 다른 말썽 피운 일은 없는 거죠.
없어. 계속 얌전히 있다가 얌전히 가. 근데 최근에는 나이 좀 있는 여자랑 같이 오더라.
나이 든 여자요?
응. 언니라고 부르던데 삼십대 중반? 후반? 뭐 사십대일지도 모르지.
누구래요?
그냥 아는 언니라고만 하더라고. 친한 언니라고. 언니도 그냥 조용히 있다 가더라고. 서로 별로 얘기도 안 해. 무슨 사연인지.
…그래요.
요한이한테도 뭐 따로 연락 거의 없는 것 같고. 참 신기하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된 거지? 하기야 그런 어린애까지 아이고… 골치아팠지. 근데 이상한 게, 요새는 외박도 안 해.
형.
요한이 당황해했으나 사장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 젊은 애들이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뭐. 그것도 다 한때야.
사장님은 빠르게 술잔을 비워냈다. 진원과 요한이 쫓아가지 못했다. 나는 맥주 한 병도 다 못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왜 요새는 만나는 여자 없냐?
없어.
너도 빨리 결혼할 여자 만나야 우리 넷이 만나서 놀고 그러지. 좀 기다려 봐. 우리 결혼하고 나면 적극적으로 알아볼 테니.
됐어.
요한이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래그래, 좀 적극적으로 알아봐줘. 시은 씨 주변에, 시은 씨 같은 참한 여자 있으면 좋겠다니까.
…근데 저도 친구가 별로 없어요.
친구 아니더라도 뭐 직장 동료라든가 그렇잖아요. 계속 저렇게 술집에서나 만나서 되겠느냐고. 아직은 뭐 젊다지만.
요한이가 형님 걱정 많이 해요.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거냐고.
나야 뭐 이제 다 늙었는데 뭐. 젊은 사람들이나 가야지.
형님이 무슨. 요새 같은 시대에 또 그러시네. 형님 나이에 초혼도 꽤 있대요. 형님은 가게에서 만난 여자도 없어요?
우리 가게가 나이대가 좀 아무래도 어리잖아. 그리고 요한이가 있는데 나한테 눈길이나 주겠어?
사장님이 쓸쓸히 웃었다.
그럼 업종을 바꾸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진원이 웃으며 농담했다.
그런가… 바꿔야 되나? 내 나이대는… 이젠 좀 포차나 그런 걸 해야 되나. 난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요한이가 아깝잖아. 그래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칵테일 만드는 게 낫지, 보기에도 어울리고.
그렇긴 해요.
그리고 나도 그 사람 생각하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거야. 내가… 만들 때마다 아직도 옆에 같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포기하기 힘들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도 형님 더 늦기 전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 출발하셔야죠. 형님 이러고 계시는 거 알면 돌아가신 형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겠어요.
죽은 사람이 뭘 알아.
다시 정적이 흘렀다. 사장님이 자작하고는 술잔을 들며 이어 말했다.
화장 안 하고 묻었어도 벌써 다 썩어 문드러졌을 사람이, 뭘 알아.
그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그의 옆에 앉은 요한이 그의 빈 술잔을 가져갔다.
좀 쉬면서 드세요. 많이 마셨어요.
어… 그래.
사장님은 순순히 요한의 말을 따랐다. 요한이 진원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젠 우리가 좀 마시자.
좋지.
진원과 요한이 술잔을 들었으므로 얼떨결에 나도 술잔을 들었고, 컵에 반쯤 남았던 맥주를 비웠다. 천천히 마셨지만 나도 두 병째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장님 말씀, 신경쓰지 말아요.
요한이 불쑥 말했다. 사장님은 반쯤 졸고 있어서인지 그의 말에 참견하지 않았다.
여자 소개 어쩌고… 부담주고 싶지도 않고, 생각 없어요, 결혼.
왜 결혼을 안 해.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놈이 무슨 결혼이야. 여자 인생 망칠 일 있어.
무슨 인생을 망쳐. 서로 잘 챙겨주면서 살면 되지. 아직 인연을 못 만나서 그래. 형님 봐봐. 얼마나 인연이면… 아, 이건 좀 아니다. 취소다, 취소.
진원도 취한 것 같았다. 말의 내용도 그렇고 발음이 뭉개지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말 하지 마. 너 장가가서 잘 사는 거 봐야 나도, 형님도, 한시름 덜고 살 거 아냐. 내가 어떻게든 너 여자 찾아줄게. 아니, 너 좋다고 하는 여자 중에 괜찮은 여자 한 명도 없어? 다 연주 같지는 않을 거 아냐.
…혹시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결혼 선물로.
요한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필요한 것들, 다 샀어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원이 손사래를 쳤다.
야, 됐어. 선물은 무슨. 그냥 몸만 와. 멋지게 차려입고 와서 하객들 놀라게나 해줘라. 노래까지 잘했으면 축가 시키고 그야말로 난리났을 텐데.
…둘이 사진 찍은 거 있으면 보내봐. 부족하지만 그림 그려줄게. 그리고 필요한 거 따로 없으면 그냥 축의금으로 낸다.
내지 말라니까. 네가 무슨 돈이 있어.
무시하지 마라. 따로 모아뒀다.
무시가 아니라… 따로 모으기까지 했어?
네가 아니라 부모님 드리는 거니까. 뭐 그래도 많지는 않아. 나중에 하랑이 결혼할 때 대비해서 또 모아야지. 하랑이가… 설마 대학 졸업하고 바로 가거나 그러진 않겠지?
요한은 웃으며 말했지만 진원은 웃지 않았다. 그는 남은 술을 벌컥 마시고 또 술을 따랐다.
술이 모자라서 내가 마시던 맥주를 마신 뒤 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요한이 어떤 마음으로 돈을 모았는지, 또 그 말을 들은 진원은 어떨 마음일지, 제삼자인 나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 너는… 그건 더 벽을 치는 거잖아. 내 결혼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은혜 갚으려는 거야. 특히 어머니한테.
요한은 담담히 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요한에게서도 진원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불편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기엔 나는 너무 제정신이었다. 진원은 말을 잃었고 요한은 옆자리의 사장님을 흔들었다.
형, 그만 가요.
으응? 아니 왜 벌써…
취했어요. 그만 가자구요.
아냐아냐, 나 안 취했어. 조금, 조금 취했어.
사장님은 취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고집을 피웠다.
화장실, 화장실 갔다오면 괜찮을 거야. 응? 요한아아~
비틀거리며 그가 일어서자 요한이 황급히 부축했다. 요한의 힘만으로 부족하자 진원도 일어서서 사장님을 부축했다.
아니아니, 요한이만 있으면 돼. 괜찮아~
사장님은 비틀거리면서도 요한에게만 의지해 걸어나갔다.
미안해. 분위기 엉망이네…
진원이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요한 씨랑 자기 부모님… 어머님 무슨 일 있었던 거지?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야. 그냥 서로 좀 오해가 있었던 것뿐이라니까. 그런데 영… 풀리지가 않네. 사실 어머니가 좀 너무하긴 했지만…
진원이 술잔을 들려 했으나 내가 못 마시게 했다. 대신 컵에 물을 따라 앞에 놔주었다.
자기도 많이 취했어. 그만 마셔. 사장님 돌아오시면 인사하고 가자.
그래…
진원이 기운없이 대답하고 물을 마셨다.
다행히 사장님이 나갈 때보다 나아진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요한의 부축도 필요 없었다.
아이고 이거 미안해요. 시은 씨 앞에서 추태를 보였네요. 미안합니다.
발음이 부정확했고 눈도 풀려 있었지만 사장님은 제법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아니에요. 많이 힘드셨나 봐요.
그러게요. 이 나이 되어도 인생이란 게 참, 그러네요… 두 사람은 참 복이 많아요. 특히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결혼하면 효도하면서 잘살아요. 좋은 부모도 되고…
사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 이제 그만 가요.
요한이 다시 말했다.
왜? 나 괜찮다니까. 딱 한 시간만 더 마시고 가자. 시은 씨, 어때요?
아… 저희는…
저희는 내일 일찍 일어나야 돼서 그만 일어나야 할 거 같아요. 죄송해요, 형님. 다음에는 낮에 식사하시죠.
진원의 말에 사장님은 어어… 그래, 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진원은 내 어깨를 감싸안고 가게 입구 쪽으로 가 계산을 했다.
가게는 2층이었고 계단이 가파른 편이었다. 진원도 취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붙잡아주어야 했다. 나는 술기운으로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요한은 사장님을 붙잡아주느라 고생이었다.
우리는 술도 좀 깰 겸 일단 대로변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아직은 낮밤의 일교차가 꽤 커서 밤에는 덥지 않았다. 주말부터는 장마 예고가 있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불볕더위가 시작된다고 했다.
먼저 가. 우리는 천천히 갈게.
요한이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그는 사장님에게 한 개비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그럼 저희는…
내가 인사차 고개를 숙이려고 하는데 진원이 내 손을 잡아 이끌어 건물 귀퉁이에 나를 붙여 세웠다. 불과 몇 걸음 안에 요한들이 있었다.
내가 설마하는 순간 진원이 키스했다. 진한 키스였다. 밀어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나의 맥박이 더 빠르게 뛰었다. 이러다 숨이 멎는 게 아닐까 싶었을 때 진원의 입술이 내 입술로부터 떨어졌다.
내가 말했지? 성공!
진원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원을 타박하기도 전에 그는 천진하게 웃으며 요한네 쪽으로 뛰어갔다.
아이고 뜨거라. 조오을 때다~
사장님이 유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진원이 나 일 보고 온다, 그동안 시은이 부탁해, 라고 요한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창피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벽에 몸을 붙여 섰다.
그러나 빨라진 맥박으로 호흡이 가빴기 때문에 좀 더 편히 숨쉬기 위해 곧 손을 내렸다. 눈은 뜨지 않은 채였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양손을 가슴에 올린 채 천천히 호흡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사장님과 요한이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떴으면 싶었다.
그런데 어느새 진원이 돌아와 내게 다시 키스했다. 좀 전과 달리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시작이었으나 이내 뜨거워졌다.
내가 눈을 뜨려 하는 찰나에,
미쳤어?!
거친 목소리와 함께 진원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니 진원이 아닌 요한이, 사장님에게 멱살이 잡혀 있었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도 바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고동치는 나의 맥박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곧 사장님이 요한을 거칠게 끌고 어딘가로 가버렸고, 나는 그야말로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