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진원이 돌아와 주변을 돌아보며 요한들을 찾았다. 그가 내게 어디 갔냐고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 그렇게 놀랐어?
진원이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으나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은 격렬하게 내 몸통을 두들겼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뭘 그렇게 새파랗게 질려서… 알았어.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주저앉을 뻔했을 때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진원이 나를 안았다.
…나 속이 좀 안 좋아. 집에 빨리 가고 싶어.
겨우 입밖으로 낸 말이었다. 어쨌든 현장을 벗어나야만 했다.
진원에게 기대어 겨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지나서, 요한이 갑자기 취기가 올라 먼저 급히 갔다는 전화가 사장님으로부터 진원에게 왔다.
진원은 많이 마신 건 형님인데 왜 지가 더 취해… 라고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는 사장님이 그 현장의 목격자라는 것을 새삼 인식했다.
그가 요한을 떼어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한은 계속 그랬을까?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본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의 장미향도 술 냄새나 담배 냄새도 그때는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었다. 왜 하필 그때 나는 눈을 감고 있었을까. 왜 요한임을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사장님은 그것이 요한의 일방적인 행위였음을 알고 그렇게 반응한 거겠지?
만약 진원이 보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거기서 내 생각은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알게 되었을 때 위안이 되는 것은 나는 요한을 진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그도 나를 다른 누구로 착각하여 그랬을까? 그러나 그는 그 정도로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나와 혼동할 다른 누군가가 있지도 않았다.
사장님에게 멱살 잡힌 요한이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 미리 요한을 피해버렸으면 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진원은 내 건강을 염려했다.
결혼 전에 함께 건강검진을 받고 결혼 후에는 운동도 열심히 해서 체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건강한 아이를 낳으려면 엄마가 건강해야 한다는 류의 식상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가 술에 취해 평소와 달리 눈치없이 지껄이는 잔소리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래, 진원은 이 일을 몰라야 한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나는 사장님을 통해 이 사태를 마무리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연락처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방법을 고심했다.
가게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겠지만 요한도 그곳에 있지 않은가. 진원에게 연락처를 물어야겠는데 마땅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둥마는둥 한 내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사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일이 있고 이틀 후였다.
- 시은 씨. 칵테일바 사장이에요. 요한이 일로 연락했어요. 시간될 때 연락주세요.
사장님의 말과 달리 간결한 문장들에서 그가 고심 끝에 보낸 문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일 뒤로 요한에게서 따로 연락이 없었던 것도 그가 막고 있는 덕분인지 몰랐다. 괜찮다면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겠느냐는 그의 제안에 나는 동조했다. 사장님은 다음날 내 직장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는 단정한 반팔 셔츠에 정장바지를 입어 차림새는 흔한 직장인 같았다. 그러나 턱수염이 덥수룩했고 뒤로 묶은 머리칼 때문에 나의 직장 동료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카페로 가서 차와 조각케이크로 간단히 요기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의 시간대였으므로 카페는 한산한 편이었다. 주문하자마자 바로 나온 음료와 케이크를 테이블 앞에 놓고 마주앉았지만 한동안 사장님과 나는 말이 없었다.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눈치싸움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
그날,
내가 사건의 당사자였고 더 목마른 자였으므로 먼저 말을 꺼냈다.
사장님 보신 대로, 아시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저는 그때 눈을 감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다시금 그때 일이 떠올랐다.
나는 왜 요한을 보지 못했을까. 왜 막지 못했을까. 아니, 왜 요한과 함께 있던 사장님이야말로 내게로 오는 그를 막지 못했을까. 사장님의 잘못이 아님에도, 오히려 그가 다급히 요한을 떼어놓음으로써 더 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리고 이렇게 먼저 연락하고 나를 찾아와준 고마운 사람임에도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결혼을 앞둔 여자의 마음은 이토록 간사했다.
그러게. 그때 시은 씨 쪽으로 가는 요한일 바로 붙잡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따로 할 말이 있나 했죠. 아니면 진원이가 시은 씨 부탁한다고 했으니 곁에 있어주려나… 술도 아직 덜 깼었고. 그런데 가만 보니 그놈이 그러고 있잖아요. 그때야 술이 확 깨더라고.
사장님도 그 광경이 되살아오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은 씨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있어서 요한인 줄 모르고…? 그쵸?
네. 그 사람… 진원 씨인 줄로만 알았어요.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쌀 반 톨만큼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대낮에 당당히 사장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뻔뻔하지 못했다.
그래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렇지 않고야 그렇게 가만히 있었을까. 그건 참 다행이에요. 그런데…
사장님이 말을 하다 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럼 역시 요한이가 문제인데… 문제는 그 새… 그놈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대요.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하고 그런 놈은 아니에요. 아마 애 얼굴 봤으면… 시은 씨도 더 뭐라 못했을 거예요. 지가 더 놀란 표정이더라고. 뭐 그래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애가 너무 엉망이라 내가 대신 용서 빌러 왔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사장님이 앉은 채로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에게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전해듣고자 했을 뿐 그에게서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마치 자식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부모처럼 굴고 있었다.
진원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일 알릴 수는 없었어요. 요한이에게는 진원이가 정말 소중한, 유일한 가족 같은 거라… 나도 요한일 어린 동생처럼 어떨 때는 아들처럼 생각하고, 놈도 내게 정말 잘하지만 진원이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라도 진원이가 용서 못하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사장님은 전적으로 요한의 편으로 보였다.
내게 사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요한을 위해 진원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그에게는 진원보다 요한이 더 소중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보다, 아니 진원만이 중요했다. 그가 요한과 내가 어울리길 원해서 요한의 도발을 참았고, 이후 그가 사과했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차라리 또다시 목을 졸리는 게 훨씬 나았다.
솔직히 저는… 그 사람이 이 일을 알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요. 요한 씨를 형제처럼 여기고 있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부모님과 요한 씨가 서로 불편해하는데도 계속 만나고 챙기는 걸 보면요.
맞아요. 진원이도 요한이한테 끔찍해요.
그러니까 저도 그 사람이 걱정돼요. 이 일… 알게 되면 상처받을까 봐. 제게 미안해하고 요한 씨에게는 화를 내겠죠. 어쩌면 그냥 한 대 세게 때리고 넘어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면요? 요한 씨라서 더 괴로워하고 용서 못하면요? 혹시라도… 저랑 요한 씨를 오해하면요?
나는 예전 여자친구가 요한에게 몰래 대시했다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진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요한을 만나기 직전 굳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때는 요한의 잘못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구나 나는 진원의 약혼녀이지 않은가. 사장님도 그때 일을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꺼내기에는 민망했다.
설마요. 시은 씨는 결백하잖아요.
정말 나는 결백할까?
요한을 처음 봤을 때 다른 많은 여자들처럼 나 역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사레가 들고 겨우 화장실에 가서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요한이 내게 진원을 사랑하느냐고 몇 번이나 묻고, 진원이 내게 하는 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격하지 않았다면, 내게 그를 줄 수 없다고 우리집으로 쫓아오지 않았다면, 그래놓고는 울면서 내 목을 조르지 않았어도 나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혹시 나는, 내가 요한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어서 진원에게 비밀로 하려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내가 요한에게 흔들렸다면 그것은 그의 출중한 외모에 따른 순간의,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 있었고 반대로 진원도 내 절친이 요한 같은 미모의 소유자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원 외의 남자가 내 옆에 서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렇다면 사장님의 말대로 문제는 요한이었다.
대체 그를, 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위험한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한 번만 눈감아줘요. 본인도 괴로워하고 있으니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요한이랑 만나는 자리는 최대한 피하구요. 아마 당분간은 진원이와도 거리를 둘 거예요.
역시 그 방법뿐이었다.
내가 생각했었고 요한도 제안했었고 지금은 사장님도 말하는. 최대한 요한과 마주치지 않는 것.
요한이가, 시은 씨 좋은 여자라고 여러 번 말했어요. 둘이 잘 어울린다고… 잘 살 거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죠.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겠어요. 그런 마음이… 잠깐 이상하게 잘못 나온 거, 말이 좀 이상하지만… 내가 보기엔. 불쌍한 놈이에요. 나는 그래도 아직까지 마음속에 떠난 사람이 남아 있지만, 요한이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나마 진원이가… 놈이 가진 전부예요.
요한도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내게 진원을 줄 수 없다고 했었다.
나를 진원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런 마음이 또 울컥 들어서 진원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그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 목을 조르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드러난 방식만 달랐을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요한과 친구처럼 지내야 할 명분이 사라졌으니까. 진원을 위해 그와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그와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진원을 위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