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말다툼 (1)

by 지구인



나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사장님은 요한을 위해 결코 이 일을 진원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 역시 진원을 잃지 않기 위해 아마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원을 위해,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일등신랑감인 진원과의 순탄한 결혼을 위해 입을 다물 것이다. 요한과 단 둘이서만 있는 자리는 만들지 않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면 진원과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요한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사장님이 이 일을 아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도 요한을 막을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 하지 않았던가.


시은 씨?


사장님이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진원 씨한테는 제가, 요한 씨한테는 사장님이 있으니 앞으로 또 얼굴 붉힐 일은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그럼요그럼요. 내 얘기가 그거예요. 고마워요, 시은 씨.


사장님의 얼굴이 확 펴졌다.


순간 요한에게는 진원뿐 아니라 사장님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혹시라도 결국 진원을 잃게 되더라도, 요한에게는 그가 부모처럼 형제처럼 함께 있어줄 것이다. 허락되지 않았던 부모와 형제의 정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남자에게서 받는 요한은 어쩌면 그만큼의 행운은 함께 하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이제 되도록 그를 안 볼 것이지만 그가 불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충분히 불행했다. 다만 나는 더 이상은 그가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기를, 그러므로 부디 내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장님과 나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헤어졌다.


나는 비밀스러운 아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적진에 첩자를 심어놓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사장님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각각 달랐지만 그 둘 모두를 위해서는 우리의 연합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본 그는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말이 많고 눈물은 더 많던 모습과는 달랐다.


다만 진원에게 감추어야 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인지 알 수 없을 그때 진원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또 불안해졌다. 무서웠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이었다. 진원도 결국에는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 일은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


그 후로 나는 칵테일바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마침 진원이 다시 바빠진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퇴근을 하고 나면 밤이 늦어 나는 이미 잘 준비를 마쳤을 경우가 많았다. 내가 퇴근하는 길에 진원 쪽으로 가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헤어지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진원이 밤늦은 퇴근길에 우리집 앞에 들러 잠깐 얼굴만 보고 갔다.


주말에는 결혼식장 물색을 비롯해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나는 피로와 다이어트를 핑계로 금주와 저녁식사 이후 금식을 선언했다. 술집에 가서 물만 마시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진원도 도리가 없었다. 이미 가게에 여러 번 갔었고 사장님까지도 따로 술자리를 가졌던 것도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진원은 혼자서도 가끔 가게에 들르는 모양이었다.


나를 만나러 오기도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오히려 그곳에 가서 요한이 만들어주는 특제 칵테일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것이 휴식이라는 것이었다. 불 꺼진 집에 바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했다. 오피스텔보다 집이 커지니 혼자 있는 게 더 싫다는 것이다. 어차피 결혼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내게 함께 가자 강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진원은 요한의 소식도 들려주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았지만 진원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한 오해를 사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진원의 말에 따르면 요한은 한동안 뜸했던 외박이 잦아졌다고 했다. 사장님의 걱정을 들은 진원이 하루는 일부러 요한의 퇴근 때까지 기다렸는데, 그는 확실히 연상으로 보이는 화려한 외모의 여자의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떠나더란다. 문제는 그 여자뿐 아니라 하루가 멀다하고 상대가 바뀐다는 것이 사장님의 한탄이라고 했다.


원래도 좀 그렇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진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야 물론 일부종사하는 나랑은 달랐지. 아직은 결혼 생각도 없고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엉겨붙는데 스님도 아니고.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형님이 걱정된다고 할 정도면… 심각한 거지. 더구나 최근에는 한동안 여자들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는데 갑자기…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형님도 모르겠다고 하고 요한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답답하네.


진원의 이어진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근데 형님은 뭔가 알고 있는 것도 같단 말이야…


…왜, 뭐라고 하셨어?


아니. 오히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죽겠다고 하면서 정작 요한이한테는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안 하시는 거 같더라고. 내 앞에서만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이상하잖아, 우리 사이에.


사장님은 요한이 내게 연락하거나 하는 것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더욱 난잡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묶어서 가둬둘 수도 없는 일이고 다 큰 남자를, 유부남도 아니고 따로 애인도 없는 남자를, 다 큰 성인남녀가 눈이 맞아 몸을 섞는 일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형님은 이러다가 차라리 아이라도 생기면 낫겠다고 하시던데, 그래, 그렇게라도 정착하게 된다면 나을지도. 근데 쉽지 않을 거야. 원치 않는 임신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이라… 그건 나만 알지.


진원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진원의 말에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요한의 삶의 또 다른 실마리가 느껴졌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원이 내가 더 캐물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날 이후로 그에 대해서 더는 관심을 갖지 않기로 한 나의 결심을 진원은 알지 못했다. 나는 요한에 대해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불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의 불행을 전해듣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일단은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설마 자기 요한 씨가 부러운 건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진원에게 짐짓 태클을 걸었다.


뭐라고?


그렇잖아. 자기 말대로 일부종사하는 거 지겹지 않아? 한창 나이에, 솔직히 좀 불만 있잖아.


아이고… 불똥이 나한테 튀네. 여보세요, 녀석처럼 살고 싶으면 내가 못할 거 같아? 요한이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꽤 잘나간… 나갔다고. 대시받은 적도 꽤 있어. 내가 왜 커플링 하자고 했는데. 오는 여자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애 초기에는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고, 그래서 진원은 나 때문에 속을 꽤 끓여야 했다. 그가 처음과 다름없이,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신실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 내가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 뭐, 나도 남자니까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그치만 자기 만나고 나서는 해본 적 없어. 정말이야.


진원은 억울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힘주어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이 났다.


뭐야… 나 떠본 거야?


내가 웃자 진원이 허탈한 듯 말했다.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일부러 정색하여 말했다.


자기가 하도 그 사람 얘기만 하니까 그렇지. 이제 그만 신경써. 다 큰 성인 남자가, 성매매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괜히 이상한 병 생기지 않게 관리나 잘하라고, 그렇게 걱정되면 콘돔이나 잔뜩 사다주지 그래.


하…


진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좀 많이 얘기하긴 했다. 그래도 내 가장 친한 친군데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맞다. 내가 좀 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요한이 내게 그런 사고를 치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원도 그 일을 알았다면 이렇게까지 요한을 걱정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기가 영 보수적인 거, 위생적인 면 중시하는 거 아니까 그래, 그렇다치자… 내가 걱정하는 건 녀석의 정신적인 부분이라고. 예전보다 갑자기 심해진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는 거야. 모르겠어?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의 모든 걸 자기가 알 수는 없어. 자기한테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자기가 자꾸 알려고 할수록 그 사람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누구에게나 한두 가지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있는 거잖아.


난 그런 거 없어.


그래? 그럼 왜 요한 씨랑 어머님 서로 불편한 이유는 말 안 해줘?


그건… 굳이 따지자면 그건 내 비밀이 아니야, 자기야. 나는 제삼자일 뿐이야. 더구나 좋은 일도 아니고.


그래서, 나한테 말 안 해줄 거라고?


미안하지만 그래. 그리고 그렇게까지 큰일 아니라니까. 오해, 서로 오해해서 그런 거야. 우리 결혼으로 내가 좀 적극적으로 풀어보려는 거고. 좋은 기회잖아.


큰일 아니라면서 끝까지 말 안 해주는 것도 나는 서운할 수 있어. 하지만 자기가 정 그렇다면 알았어. 더는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마워.


대신 자기도 되도록 나한테 요한 씨의, 듣기 불편한 이야기는 안 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자기도 그만 걱정했으면 좋겠어. 여자들이 쫓아와 요한 씨 따귀라도 올려치거나 머리채 뜯는 일 같은 일 벌어진 거 아니면 그냥 둬. 이제 우리 결혼하면 명백히 내가 자기의 옆에 서는 거고 요한 씨는 어디까지나 내 다음이야. 만약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할 거야. 아니야?


…그래. 맞아.


그런 결심도 없이 결혼하자고 할 생각 없는 남자 아니란 거 알아. 책임감 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그리고 그래서 그 사람도 챙기고 싶어하는 것도 알고. 아니까 나도 최대한 자기한테 맞춰주려고 했어. 요한 씨랑도 잘 지내보려고 했고. 근데 아무래도 내가 친하게 지낼 타입은 아닌 것 같아. 더구나 요즘같이 그런 상태라면 더욱 얼굴 보기 좀 그래. 내가 심한 거야?


아니, 아니야. 이해해.


그러나 진원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내게 미안해하고 또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끝까지 단호하게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 우리가 우리 사이 일이 아닌 요한 씨 일로 싸워야 돼? 왜 매일같이 야근에 결혼 준비까지 정신없는 자기가 친구 일로 걱정까지 해야 되냐고. 그리고 나는 왜 그런 자기를 봐야 되냐고. 결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거 같은데.


나는 마치 대본을 숙지한 배우라도 된 것처럼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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