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은 한동안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알았어. 미안해. 자기가 그렇게까지 불편해하는 줄 미처 몰랐어. 많이 친해졌다고, 특히 이삿날에 그래보였거든. 그러고 보니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었구나. 그날 이후로 자기가 싫어할 만한 얘기만 들었으니 그럴 만해. 내가 눈치가 없었네. 미안해.
자신감 넘치는 것이 매력 중 하나인 진원의 주눅들고 시무룩한 얼굴은 보는 것은 내게도 힘든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데 내가 일조하고 있는 이 상황이 싫었다.
그치만 시은아. 요한이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절대 나쁘거나 더럽거나… 그런 녀석 아니야. 그리고 이젠 자기도 짐작하겠지만… 가엾잖아. 측은지심으로 좀 봐줘.
나는 물끄러미 진원의 얼굴을 보았다. 결혼할 여자와, 형제같이 여기는 절친 사이에서 분투하는 그야말로 가여웠다.
그래, 알았어… 노력할게.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진원도 따라 한숨을 쉬더니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평소 같으면 나를 와락 끌어안았을 텐데 아무래도 그 역시 지친 것 같았다.
우리는 야근 후 우리집 앞으로 온 진원의 자동차 안에 있었다. 보통은 만날 때 포옹하고 헤어지며 키스하는 짧고 단순한 만남이었지만 그날은 요한의 일로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진원은 부쩍 지친 얼굴로 돌아갔다. 가벼운 굿나이트 키스도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진원이 먼저 요한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다.
당연히 셋이 보자거나 하는 말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요한의 안부를 물어봐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진원은 그마저도 괜찮아, 별일없어, 신경쓰지 마, 라는 하나마나한 대답으로 반응했다. 내가 화난 거냐고 묻자 그는 애써 웃으며 내가 괜한 신경쓰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얼마 후에는 마침내 결혼식장을 예약했으므로 본격적인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었고, 나는 더 이상 요한에게 신경쓸 여력이 없게 되었다.
사진과 영상을 촬영할 스튜디오, 그를 위한 드레스 고르기, 미용실 예약 등은 플래너가 있어도 최종 결정은 결국은 예비 신부의 몫이었다. 그나마 신랑신부와 양가 어머니들의 한복은 진원의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역시나 가격대가 높은 곳이어서 엄마와 나는 못내 그 돈이 아까운 것이 흠이었다. 신혼여행 관련해서도 일이 많은 진원을 대신해 내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다 들이지 못한 가구와 가전, 식기와 소소한 생활소품들을 고르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진원의 어머니와 내 엄마 모두를 만족, 아니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야 했다. 내 엄마의 잔소리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예비 시모의 눈총에 대해서는 경험도 자신감도 없었고, 엄마의 말대로 ‘반반결혼’도 아닌 마당에 되도록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을 쉴새없이 부지런히 살펴야 했다. 쉬는 날마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진원과 데이트나 하고 드물게 친구들과 만나던 느긋하고 단순한 생활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엄마는 예비 사위의 식사를 걱정했다.
그냥 알아서 잘 챙겨먹고 있다고 했으면 됐을 텐데 별생각없이 요새 다시 바빠져서 아무래도 소홀하다고 한 내 입이 방정이었다. 당장에 엄마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이젠 네 서방인데 그렇게 남 얘기하듯 해? 너 같은 며느리 맞을까 봐 무섭다. 느이 시엄마 자리가 애저녁부터 반찬 사다먹은 사람이라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 이것아.
진원의 어머니는 나만큼이나 살림에 서툴렀다.
그것은 젊어서부터 친정의 지원으로 사람을 부리는 호사를 누리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녀 역시 나만큼이나 집안일에 큰 관심도 욕심도 없었다. 그녀와 나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일 것이다. 자식이 좋아하는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택배로 부쳐주는 일따위는 그녀의 사전에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무던한 성품이어서 어차피 재주도 관심도 없는 아내에게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내 예비 시어머니가 관심을 쏟아온 것은 외모를 가꾸는 일 - 그럼에도 그녀는 미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엄마는 돈 들여 관리해서 그 정도지 원래 인물은 없다며, 진원이 아버지를 닮아 다행이라고 평했고 나도 동의한다. - 과 값비싸고 고급진 물건들을 사들이는 일,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 활동이었다고 진원은 말했다. 어렵게 얻은 삼대독자와 오랜 시도 끝에 겨우 얻게 된 늦둥이 딸에게도 진원의 어머니는 주로 팔자에 타고난 것 같은 금전력으로써 애정을 보였다고 했다.
진원이 모친에게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것이 그래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와 요한과의 소원함을 초래한 어떤 계기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진원이 어머니에게 다소 냉랭하여 나에게도 대리효도를 강요하지 않을 뿐더러,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나를 불러댈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식구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한평생 직접 만들어온 나의 엄마는 주말에라도 김서방을 불러 밥을 해먹여야겠다고 나섰다. 이 참에 너도 김서방이 좋아하는 한두 가지 음식은 배워놓으라는 것이었다. 요리 못하는 시엄마 기도 좀 죽여놓을 겸 식혜나 약밥 같은 그럴 듯한 전통 음식을 배워놓으면 어떻겠느냐고도 했다.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이니, 엄마는 타고나기를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삼십 년 갈고닦은 ‘주부력’을 자신과 닮지 않아 별로 희망이 없는 딸에게 억지로라도 전수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승리감을 맛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음식까지 배울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또 진원이 우리집에 자주 오게 되면 그때마다 대청소에 음식 준비로 나와 아버지까지 엄마의 조수 노릇을 해야 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나마 아버지보다는 나은 내게 많은 임무가 부여될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엄마의 마음에 들지 못하고 잔소리 폭격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진원을 처음 집에 초대할 때의 일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그 뒤로 한 번 더 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내가 도저히 못하겠어서 진원에게 솔직히 말했다. 진원은 어머님 솜씨가 일품인데 아쉽긴 하지만 참겠다고 웃으며 말했고, 나는 엄마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가니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었다.
진원은 와서 편히 먹고 쉬다 가는 데 한두 시간이면 족할 것이지만 그를 위한 준비를 위해서는 몇 배의 시간에 걸친 가사노동이 필요했다.
게다가 어차피 결혼 후에는 아무래도 친정에 크고작은 일들은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을 텐데, 벌써부터 엄마에게 백년손님 대접까지 시키고 싶진 않았다. 더구나 진원은 건강에 신경쓰는 편이라 되도록 좋은 음식 위주로 사먹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도 철철이 홍삼이나 흑염소즙 등의 건강 보조식품을 챙겨 보냈다. 그러니 내 엄마가 그의 식사까지 챙겨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진원이 우리집까지 오고갈 시간에, 조금이라도 잠을 더 자는 것이 낫다고 엄마를 설득했다. 배불리 먹고 우리집에서 한숨 자면 되지 않느냐는 엄마의 반박에 진원은 짧은 잠을 잘 못 자고 길게 숙면하는 타입이라고 둘러댔다.
결국 엄마와 나는 진원을 집에 불러다 해먹이는 대신 그가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해서 갖다주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그마저도 나는 그것들을 챙겨먹을 시간도 없다고 최후까지 방어해 보았지만, 주말에 어차피 만날 때 한 끼라도 집에서 먹으면 몸에도 좋고 돈도 아끼고 좋지 않느냐는 엄마의 ‘일석이조’ 공격에는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지방에서 근무하는 남동생 재영이 올라오는 주말이었고, 진원과 나는 모처럼 별다른 일정 없이 쉬기로 한 토요일 이른 오후였다.
동생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모처럼의 소개팅에 바로 나가지 못하고 나와 음식이 담긴 쇼핑백과 보자기들을 실어다 주어야 했다. 동생은 형이 좀 와서 가져가지… 라고 잠시 투덜거렸다가 하나뿐인 매형 잠 좀 푹 자라고 그거 하나 못해줘? 싸가지 없게! 라는 불벼락만 맞았다.
미안하다, 야. 엄마가 하도 성화라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알아. 누나가 하자고는 안 했겠지.
동생은 운전대를 잡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려서는 그래도 서로에게 하나뿐인 동기간이라 나름 친하게 지냈는데 성인이 된 후로는 아무래도 동성간이 아니라 그런지 우리는 데면데면해졌다. 누나인 내가 좀 더 챙겨야 하는데 나는 워낙에 살갑지 못한 성격이었다. 더구나 동생이 지방에 있다 보니 더욱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 상태였고.
너도 같이 먹고 가면 좋을 텐데.
뭘. 아침에 대충 맛은 봤고 천천히 먹으면 되지.
진원 씨만 먹으라고 한 거 아니야. 모처럼 너도 잘 먹이려고 엄마가 한 거다. 알지?
응.
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무던하고 수더분한 편이었다.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 빼고는 별달리 부모님 속을 썩인 일도 없었다. 제법 튼실한 기업의 생산직으로 근무하며 제 용돈을 빼고는 엄마에게 꼬박꼬박 부치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다. 앞으로 엄마처럼 부지런하고 야무진 여자만 만나면 만사형통이겠지만, 요새 세상에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나부터도 엄마의 발끝도 못 따라가니까.
우리는 차 안에서 거의 말이 없었고, 조용히 진원의 새집에 도착했다.
진원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집에 간다고 메시지를 남겼으나 답이 없는 상태였다. 잠을 자고 있다면 깨우고 싶지 않아 일부러 전화는 하지 않았다. 진원은 지난밤에도 내게 들르지 못할 정도로 늦게 퇴근한다고 했었다.
동생은 양손에 가득 짐을 들고 나는 쇼핑백 하나를 가슴에 안은 채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리집에서도 가까운 편인데 누나 직장은 좀 멀어지겠다. 괜찮겠어?
감안해야지, 뭐.
그거 하나 아쉽네. 그래도 여자 쪽으로 가깝게 잡아야, 아이도 낳을 텐데 그게 낫지 않나?
너도 잘 아네. 그렇다고는 하더라.
내 일터는 진원의 직장과도 반대 방향이어서 아침에 같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정히 힘들면 우리집 근처로 이사가는 것도 나는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진원의 어머니에게는 확정 전에는 절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사람… 자는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도 못 보고 가게 생겼네.
나중에 보면 되지. 우리 식구 집들이도 할 거 아니야?
그럼.
문 앞까지만 들어다 줄게. 괜찮지?
그래, 고맙다.
동생은 현관 앞에 짐을 부려놓고 바로 내려갔다. 그 아이는 소개팅 잘해, 라는 내 말에 씩 웃어 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는 되도록 소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현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