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비밀

by 지구인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현관에 익숙지 않은 남성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엄마가 일러준 대로 음식을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바로 냉장고에 넣어야 할 음식들을 넣어놓고 나머지는 조리대 위에 올려둔 뒤 나는 조심스레 침실로 갔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방문 틈으로 에어컨 냉기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침대 위에서 웃통을 벗은 채로 곤히 자고 있는 진원과, 바닥에 앉은 채 진원의 얼굴 가까이 매트리스에 엎드려 있는 요한을. 상상도 못한 광경이었으므로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흡, 하고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삼켰다.


나는 그대로 선 채로 둘을 보았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마치 진원을 간병하기라도 한 듯, 아니면 차라리 기도라도 하다 잠이 든 것 같은 요한의 모습이 특히 그랬다. 진원의 얼굴 또한 요한 쪽을 향해 있었으므로 내가 마치 둘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나는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당혹감으로 뒤로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팔베개를 한 채 나를 보는 요한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가 천천히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몸이 굳은 채로 그와 마주보았다.


시은 씨…?


요한이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시은 씨.


요한이 완전히 잠이 깬 목소리로 나를 다시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요.


요한이 허겁지겁 방에서 따라 나왔다. 그가 입은 옷이 진원의 트랙슈트임을 나는 알아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요.


나는 싱크대에 몸을 붙인 채 말했다. 요한이 다가오다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왜 그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몰래 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나에게 말도 없이 진원이 들였단 말인가. 어느 쪽이든 용납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좀 전에 보았던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예요. 왜 여기 있어요? 뭐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그게…


요한이 어쩔 줄 몰라하며 더듬거렸다. 나 역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진원을 내게 못 준다는 것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엉뚱한 방향이었던 것인가? 아니, 그렇다면 요한을 마지막으로 봤던 날의 그 불미스러운 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빨리 진원을 깨워서 닦달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뭔데요. 내가 생각하는 그거요?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요한은 움찔 놀랐다.


그때서야 그의 얼굴이 이삿날 때보다도 수척한 것을 알았다. 얼굴 살이 많이 빠져서 턱선은 더 날렵했고 눈이 커 보였다. 한 손에는 베이기라도 했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상태를 염려해 줄 정도로 나는 아량이 넓지 못했다.


정말 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참아줘야 되냐고!


어디서 그런 목청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당황스럽고 화가 난 적은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요한이 내 목을 졸랐던 때보다, 나를 추행했을 때보다 훨씬 더 화가 났다.


시은아.


진원이 내 목소리에 깼는지 방에서 나왔다. 사각팬티 차림이었다. 내가 질겁한 뒤로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더울 때는 그러고 자고 일어나서도 바지만 입고 있는 것이 진원의 습관임은 알고 있었다.


쉬, 쉰다고 했었잖아. 재영이도 와서 집에 있는다고…


진원이 버벅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요한을 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 몰래 이 사람 오게 했어? 언제 그랬어?


어… 어젯밤에… 일이 생겨서.


무슨 일.


진원이 주뼛거렸다. 나는 요한을 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내게서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진원은 그런 요한을 보더니 내 손을 붙잡고 서재방으로 데려갔다.


자기야, 말 못한 거는 잘못했어. 근데 자기가 요한일 불편해하니까… 차마 바로 말 못했어. 미안해.


무슨 일인데?


…여자들이 가게로 찾아와서 소란이 있었대. 형님이… 사장님이 아무래도 좀 피해 있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당분간 밤에 나가지 못하게 감시도 해달라고 하셔서.


진원은 자신의 잘못인 양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설마 내가 내뱉듯 말했던, 여자들이 요한에게 따귀를 날리고 머리채를 붙잡는 종류의 일이 생겼단 말인가.


그날의 일을 알고 있고 내게 요한과 만나지 말라던 사장님이 진원에게 부탁하기까지 했다면 보통 일은 아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게 자주 집에 와달라고까지 했던 진원이, 내게 말도 없이 요한을 곧 나의 ‘우리집’이 될 이곳에 몰래 들였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이제는 진원만의 집도 아니고 내가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곳에 내 사전허락은커녕 사후통보조차 없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던 말인가.


나의 비밀만큼은 아닐지라도 진원도 내게 비밀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한 때문에 우리 둘 모두 서로에게 비밀이 생기고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은… 자기는… 저 사람 안방에서 자고 있더라. 알고 있었어?


어. 소파는 좀 그래서.


…우리 침실이잖아. 이삿날에는 들어가지도 않더니 뭐야.


미안. 내가 그러자고 했어. 아직도 거실 너무 비어 있고 에어컨 이중으로 켜기도 그래서. 침대에는 안 올라왔어. 맹세해.


진원은 요한이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 둘의’ 매트리스에 팔과 얼굴을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안다면 진원은 일반의 남자들처럼 기겁할 쪽이었다. 차라리 요한보다 진원이 먼저 깨어 그 광경을 알아채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저 사람 언제까지 있을 건데?


나는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을 머릿속에서 떨치기 위해 고개를 잠깐 젓고 난 뒤 진원에게 물었다.


글쎄. 그래도 한 일주일 정도는… 말하려고 했어. 자기 기분 봐서… 오늘이나 내일쯤? 정말 미안해, 자기야.


진원은 정말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요한만 아니었다면 그가 내게 이렇게 쩔쩔맬 필요도 없었다. 진원이 나쁜 남자였다면 울엄마가 사준 내 명의 내 집인데 지금 당장 너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내 형제 같은 친구 잠깐 지내게도 못해?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용렬하고 치졸한 말이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정 앞에 사랑만 앞세우는 옹졸한 사람이었다면 요한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눈치만 보느라고 그를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은 남자이고 관대한 사람이므로 오히려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상황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나는 불안했다. 못내 불길했다.


나는 좋지 않은 예감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엄마가 자기 먹으라고 음식 해주셨어. 재영이가 태워다줬고. 알았으면 자기가 오겠다고 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었어. 오면서 메시지는 보냈었고 자기 깰까 봐 전화는 안 했어.


어… 어, 그래. 어머님께 전화드려야…


아직 따뜻한 건 따뜻하니까 먼저 먹어. 먹고 해. 요한 씨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던데 잘됐네. 곰탕도 있는데.


나는 방문을 열고 나와 주방으로 갔다. 진원이 조용히 나를 따랐다.


요한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나를 피해 아예 나가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마치 그럴 기운조차 없는 듯 보였다. 왜 사고란 사고는 다 자기가 쳐놓고 스스로 못 견뎌하며 저렇게 비쩍 말라가는지,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엄마의 딸이 분명했다.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찬 음식은 차게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아일랜드 식탁에 상을 차리고 있었다. 나는 다소 당황해하는 진원에게 위아래 옷을 입고 오라고 시켰고, 넋이 나간 듯 앉아 있는 요한에게는 와서 앉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요한은 주뼛거리며 식탁으로 와 앉았다. 진원이 나오자 그와 나란히 앉도록 했다.


나는 밥과 곰탕을, 갈비찜과 잡채와 나물들과 생선구이와 새로 담은 오이소박이와 김치냉장고에서 새로 얽은 김장김치 등을, 접대용이 아닌 평상시에 쓸 거라 부담감 없이 사놓았던, 잘 깨지지 않는 재질의 무늬 없는 하얀 그릇들에 담아 차렸다. 엄마가 온힘을 다해 꽁꽁 싸맨 덕분에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으나 곰탕은 데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전자레인지에 1분 가량 돌린 국에서 다시 힘차게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는 만족했다.


두 남자가 멀뚱하니 쳐다보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에 집중해 마치고 나서 말했다.


어서 먹어. 드세요.


자기는?


응. 어차피 의자 두 개뿐이고 나는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 얼른 먹어.


아침을 먹었다기보다는 주로 음식의 간과 맛을 보느라 이것저것 조금씩 주워먹은 상태였으나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엄마 역시 눈대중과 손맛으로 음식을 하는 타입이라 간보기는 결국 내 몫이었다.


진원은 내 재촉에 수저를 들었으나 요한의 두 손은 여전히 그의 무릎 위에 있었다. 진원이 알아차리고 그의 붕대를 감은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입맛 없어도 먹어둬. 어머님이 정성껏 해주신 집밥이야. 먹으면 기운날 거야.


그래요. 어서 먹어요. 맨밥 먹기 힘들면 국에 말아서 먹어요.


숟갈을 든 요한의 손이 앙상했다. 그의 퀭한 눈과 마주쳤을 때 이번에는 내가 시선을 피했다.


요한은 말없이 국에 밥 반 공기를 천천히 말았다. 손짓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어렵게 한 입을 먹고 나자 비로소 진원이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맛있는데.


진원이 짐짓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그것이 나보다는 요한을 의식해 하는 말임을 느꼈다. 요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응, 정말… 이라고 읊조렸다.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파리했다. 나는 두 남자의 앞접시에 갈비찜 한 조각씩을 놓아주었다.


둘 다 너무 말랐어. 살 좀 붙으면 좋을 텐데.


둘 다, 라고 했지만 내가 의도한 것은 요한이었다. 아마 진원도 알 것이다.


진원은 기본적으로 탄탄한 체격이라 날렵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마른 느낌은 주지 않았다. 다만 바빠진 업무와 요한의 일로 신경을 많이 써서인지 전보다 얼굴 살이 약간 빠져 보이긴 했다. 그래도 보기 안 좋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건강에 신경쓰는 타입이니까.


그러나 요한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손목도, 진원의 옷으로 감춘 허리에도 살이 없었다. 그에게 화가 나야 할 상황인 나조차 그의 몰골이 안쓰러운데, 진원은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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