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삿날 (2)

by 지구인



침실에는 아직 매트리스만 새 물건이었다. 진원이 쓰던 장스탠드가 외로이 옆에 서 있었다.


역시 진원의 옛집에 있던 TV는 주사용자인 내가 입주 전인 관계로 아직 설치 전이었다. 그 TV는 침실에서 사용하고 거실에는 프로젝터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집안일을 할 때 사용할 핑계로 주문한 이동형 스마트TV는 우리집으로 수령해서 내가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서재로 쓰게 될 방에는 만화를 포함한 진원이 사모은 책들로 쌓여 있었다. 진원의 말대로 나중에 천천히 같이 살펴보며 정리해야 할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내 책들까지 합쳐지니까 이번 기회에 더 이상 보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는데 짬이 날지 모르겠다.


자기는 영 못하겠어서 요한 씨 부른 거야,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을.


그럼 어떡해. 내가 한다고 해봤자 자기 맘에 안 들 거 아냐. 지난번에, 자기가 갑자기 나한테 왔을 때 못 느꼈어? 요한이가 보다못해 치워줬어. 물론 욕은 좀 들어먹었지만.


아, 그날.


내가 요한에게 목이 졸리고 진원에게 달려갔던 그날. 그러나 진원의 집 상태가 어땠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내 관심사는 오직 진원, 정확히는 그의 몸뚱이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자기 혼자 사는 집이… 이제 아닐 건데 내가 미안해지잖아. 내 친구가 아닌데.


에이, 벌써 여러 번 봤잖아. 꽤 편해진 줄 알았는데.


진원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가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제 좀 실감이 난다. 우리 결혼한다는 게.


응… 근데 식장을 얼른 잡아야 할 텐데.


그러게. 좀 더 알아보자. 걱정 마.


진원이 내게 입맞추려 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아침부터 중노동하느라 힘들어서 숨 좀 돌리고 왔다. 밥 시켰어?


너 기다리고 있었지. 짜장면이지?


간짜장. 요즘엔 없는 데도 많던데.


있는 데로 시킬게. 자기도지?


…응.


진원은 간짜장 둘에 짬뽕 하나, 탕수육 하나, 그리고 볶음밥을 추가하여 주문했다.


그냥 나가서 먹는 게 편하잖아?


요한이 말했다.


같은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배달음식은 매장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래도 명색이 이삿날인데 시켜서 먹어줘야지.


몰라. 설거지랑은 네가 해라. 기운 없다.


요한이 털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것도 진원이 쓰던 것이었다. 식탁은 몰라도 소파는 한시라도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굳이 가지고 온 것이었다. 요한이 등받이에 기대어 한 팔로 눈가를 덮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래, 고생했다. 밥 올 때까지 좀 누워 있어. 우린 방에 들어가 있을게.


아니야. 그냥 이러고 있음 돼.


요한이 팔을 내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진원이 나를 침실로 이끌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서재 쪽을 가리켰다. 진원이 한숨을 쉬며 나를 따라왔다.


시트도 새로 갈았단 말이야.


진원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요한을 거실에 두고서는, 아니 그가 아닌 다른 누구였더라도, 그저 말 그대로 손 잡고 눕기만 하는 것이라도 나는 타인을 한 집에 두고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기는 가끔씩 바보같이 굴더라.


내가 방문을 닫고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러나 진원은 아랑곳없이 나를 껴안았다. 힘이 세서 막을 수 없었다. 요한에게 들릴까 봐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빨리 결혼했음 좋겠다.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 거 너무 지겨워.


진작부터 독립을 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동감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군대를 빼고서도 진원이 분가해 살아온 것이 십 년 가까이 되니까 그럴 수 있을 법했다.


그래서인지 사귄 지 얼마되지도 않을 때부터 진원은 결혼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결혼을 기피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너무 결혼을 전제로 해버리니 우리의 연애가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는 점도 없잖아 있었다. 마치 결말을 다 아는 영화를 보듯이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별생각없이 한 이야기에 눈빛이 싸늘하게 변한 동료가 있은 뒤로 나는 나의 연애에 대해 누가 묻지 않는 한 되도록 말하지 않았다. 그 동료는 결혼을 하고 싶어했으나 남자 쪽이 경제적인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얘기를 다른 동료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딱히 진원을 자랑할 생각도 없었지만 괜한 부러움과 질투를 받을 생각은 더욱 없었다.


…조금만 참아. 내가 좀 더 자주 올게.


응.


나는 진원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게만, 아니 나와 요한에게만, 그마저 드물게 부리는 진원의 어리광이었다.


진원도 나도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며 사랑만 받으며 자라지는 못했다. 진원은 부모에게 사랑보다는 기대를 받았고, 나는 기대조차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나마 뒤늦게 학교 성적이 올라 중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고 어렵지 않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에야 엄마의 시름을 덜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 엄마를 가장 기쁘게 한 일은 진원을 사윗감으로 데려온 일이었음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던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며 자라지 않았다면 나는 애정에 굶주린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듣기 좋은 소리는 좀처럼 하는 법이 없는 괴팍한 성격의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들에게조차 아끼던 애정을 아들손주도 아닌 나에게만 주었다. 당신의 첫손주이자 같은 방을 쓴다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로.


진원은 포옹을 풀고 아까 하지 못했던 키스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일부러 쪽, 소리내어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와, 너무해.


때마침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원의 손을 잡아 거실로 이끌었다.


두고봐. 오늘 내로 꼭 성공한다.


진원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패널의 문열기 버튼을 눌렀다.


요한은 그 사이 선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가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떴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했다.


괜찮아요?


아… 네. 요새 잠이 좀 부족해서.


말을 하지. 일부러 너 쉬는 날로 잡은 건데.


진원이 음식을 받으러 현관으로 나가며 말했다.


나가서 삼계탕이나 뭐 그런 거 먹을걸…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짜장면 좋아해요.


요한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저를 챙기려고 하는 것 같길래 내가 할게요, 말렸다. 요한은 느릿느릿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아직은 휑한 거실 바닥에 두꺼운 캠핑매트를 깔고 배달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이어서인지 먹을 만했다. 요한은 탕수육은 몇 개 집어먹지 않았고 볶음밥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짜장면은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첫입을 먹은 뒤로 먹는 속도가 빨라졌고, 금방 그릇을 비웠다.


점심을 먹고 나서 뒷정리는 진원과 내가 맡았고 우리는 남은 음식물을 한 데 모아 쓰레기봉지에 담고 진원이 뒷설거지를 마쳤다. 나는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아직 구매하지 않은 것을 반성했다.


요한은 캠핑매트를 접어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태워다줄게. 가자.


…이따가 저녁도 먹자며.


그나마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서인지 아까보다는 안색이 나아 보였지만 요한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 마치 쉰 것처럼 들렸다.


그래. 저녁은 너 몸보신 좀 시켜주려고 그랬지. 형님도 약속 있다며. 그럼 너 또 제대로 안 먹을 거 아냐. 근데 잠이 훨씬 중요하잖냐.


소파에 누워서 좀 자요. 우린 나가 있고. 이따가 다시 만나면 되죠.


나답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진원이 보내려는 요한을 내가 붙잡다니. 내가 말해놓고 나는 당황했지만, 진원은 알아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쉽잖아, 우리.


나는 말을 번복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요한의 파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원의 말대로 몸보신이 될 만한 무엇인가를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대로 보내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 안 돼요. 이따 좋은 거 먹어요. 제가 꼭 사고 싶어요.


나는 요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진원을 데리고 침실로 가서 붙박이장에 있는 여분의 베개와 덮을 이불을 가지고 나오게 했다. 진원이 그것들을 던져주듯 요한에게 안기자 요한은 괜찮은데… 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아침부터 너 부려먹었다고 나 혼났어. 어지간히 맘에 걸렸나 봐.


요한은 진원을 따라 웃었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럼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전화해. 혹시 모르니 전화기는 벨소리로 해놓고. …나 뭐 입을까? 자기가 골라줘.


진원은 내가 어리둥절해할 사이도 없이 나를 이끌어 다시 침실로 갔다. 옷을 골라달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핑계였고, 들어가자마자 진원은 나를 와락 안았다.


신경써줘서 고마워, 시은아.


…내가 할 일을 대신 해준 거잖아. 당연히 해야지.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저녁 때 다시 만난 요한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북부에 위치한 능이백숙집에 갔다. 요한을 위해 나는 값비싼 능이버섯을 추가주문했다.


그는 고기보다는 버섯을 더 입에 맞아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버섯을 최대한 양보하고 나는 부추 등 다른 야채 위주로 먹었기 때문에 닭은 거의 진원의 몫이었다. 진원은 닭고기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리고 셋이 먹으니 찹쌀죽까지 남기지 않고 비울 수 있었던 것도 돈 내는 사람으로서 뿌듯했다. 요한도 찹쌀죽은 제법 열심히 먹었다. 진원은 올여름 복날 전후로 먹으러 오자고 좋아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타는데 요한에게 전화가 왔다.


네, 형. 아… 한 시간 좀 넘게 걸릴 거 같은데. 네, 알았어요.


…형님이셔?


응. 친구분이 일이 생겨가지고 약속이 취소됐다네. 난 언제 오냐고. 같이 한 잔 하자고. 얼른 가자.


흠… 시은아, 형님이랑 다같이 한 잔 어때.


나는 진원의 제안에 당황했다.


약간 삐끗거릴 뻔했던 요한과의 만남을 잘 마무리짓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해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진원이 식사 후 술을 마시자고 하면 나는 슬쩍 빠질 생각까지는 했다.


원래 오늘 같이 모였으면 했었잖아. 생각해 봐. 가게 쉬는 날 월요일뿐인데 시간 맞추기도 애매하고 아니면 우리가 맞춰야 되잖아. 그런데 좀 여유 없는 거 아니야? 촬영하고 신혼여행하고 그런 날 다 빼면.


진원은 닭고기로 가득 차 부른 배를 무릅쓰고 몸까지 돌려 뒷좌석의 나를 보며 설득했다.


…식사 약속이었잖아. 우리는 벌써 다 먹었고.


흐흐. 자기 부담스러워할까 봐 밥이라고 한 거지 술자리면 더 좋아하실걸.


나도 배가 부르니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다변인 사장님이 오면 남자들 셋이서 신나게 떠들 테니 나는 그냥 듣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듣다가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될 수도 있었다. 혹시 진원과 요한이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요한 씨도 있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자기는 참… 이럴 때는 못 말리겠더라.


나는 짐짓 진원을 타박했다. 진원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요한에다 좋아하는 사장님까지 또 모이게 됐으니 신이 난 것 같았다.


사실 진원은 다시금 일이 바빠지고 있어서 우리는 결혼 준비 외에는 여유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혼 때보다는 결혼 전에 일이 많은 것이 낫지 않느냐며 그는 내게 양해를 구했다. 진원은 신혼 때는 단 몇 달만이라도 야근 없이 퇴근할 결심을 여러 번 내게 말했다. 함께 만나 퇴근해 들어오면서 장을 보고, 어설프지만 정성이 담긴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고 평화롭고 행복한 밤을 보내다가 함께 잠이 들고. 아이가 생기면 그런 여유는 없어진다고 하니 일 년 정도는 우리 둘만 지내자고도 말했던가.


나는 당장의 결혼식 준비만으로도 벅차 신혼생활의 로망을 꿈꾸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라지만 그만큼 신경써야 할 것도 많았고, 살림도구들도 아직 구비되지 않은 것들 천지였다. 결혼식 자체야 플래너 등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별 문제는 아니었다.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달에 바로 시아버님 생신이 있었다. 양가 가족들을 각각 집에 모셔야 할 테고, 진원과 나의 지인들의 집들이도 치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최소화하고 외식으로 대체한다 해도 결국에는 안주인인 나의 책임과 권한에 따른 일들이었다. 진원이 도와준다 해도 그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못할 것이야 없겠지만 잘할 자신도, 사실은 별로 관심 없고 귀찮은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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