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삿날 (1)

by 지구인



진원이 이사하는 날이 되었다.


옷과 책들 정도 말고는 큰 짐이 거의 없어 이사는 금방 끝났다. 진원에게 당장 필요한 에어컨은 이미 들여놨기 때문에 이사 당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침대 등 침실 가구는 아직 고르는 중이었다.


진원은 내게 점심 먹을 시간에나 맞춰 새집으로 오라고 했다. 주말마다 결혼 준비로 바쁜데 괜히 모처럼의 연차에 늦잠도 못 자고 먼지 마실 필요 없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이삿날이니 함께 짜장면과 탕수육은 꼭 먹어야 한다고 진원은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정작 전날 늦게까지 일했을 요한은 아침부터 불러댄 모양이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마주친 요한의 얼굴이 수척했다.


왔어요?


나를 알아본 요한이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도 함께 밥을 먹자는 얘기는 진원에게 들었지만 먼저 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약간 놀랐다.


아무리 그가 불편해하는 낮이라지만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또 놀랐다. 더구나 아무리 봐도 방금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고, 몸을 쓰기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는 또 담배를 피우고 있었거나,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다녀오는 길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언제 왔어요?


…오피스텔에서부터요.


요한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을 아침부터… 미안해요.


시은 씨가 왜요. 나도 싫으면 안 왔죠.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 이 정도뿐이라…


요한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단지 안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젠 완연한 여름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땡볕 아래서는 금세 땀이 났다.


기분이 어때요? 이제 결혼하면 살 집이잖아요.


네. 좋아요.


이런 아파트는 얼마나 하나… 결혼하려면 이런 집이 있어야 되는 거죠?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운이 좋은 거죠.


…휴지, 세제 어떤 것을 좋아할지 몰라서… 휴지는 몰라도 세제는 시은 씨 취향이 있을 것 같아서 안 샀어요. 아직 쓰던 거 남아 있다고도 하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요한이 눈치챈 듯 웃으며 내일쯤 도착할 거예요, 라고 말했다.


자취한 적이 없어서 취향이랄 것도… 이제부터 저도 공부해야 돼요.


나는 옅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살림솜씨만큼은 우리 셋 중에 요한이 가장 뛰어날 것이다.


나는 삼십 년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산 적이 없었던 데다가, 엄마는 내가 손이 느리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결혼하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며 굳이 시키지 않았다. 나는 내 속옷 정도나 빨아 입고 설거지 정도나 하면 되었다. 청소기를 돌리는 것은 주로 아버지 몫이었다. 요새는 반찬도 사다 먹으면 되는 세상이라며 엄마는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맞벌이하지 않고 살기 힘든 시대라 오히려 옛날보다 여자들이 살기 더 힘든 것 같다며 엄마는 혀를 찼다.


진원은 대학 때부터 독립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집안일은 엉망이었다.


못한다기보다는 관심 자체가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빨랫감은 거의 세탁소행이었고 식사는 당연히 밖에서 해결했다. 배달 음식도 김밥이나 샌드위치같이, 치워야 할 쓰레기가 덜 나오는 종류를 선호했다. 분리수거가 귀찮아서 택배도 어지간하면 다 직장으로 시켰다. 하다하다 가사도우미를 부른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그의 집에 가게 된 뒤로는 좀 더 신경쓰긴 했지만, 진원과의 결혼생활에서 걱정거리가 있다면 바로 집안일이었다. 한 명은 서툴고 다른 한 명은 관심도 없고 시간도 없는 최악의 조합. 어쩌면 진원의 말대로 미리 한 집에 살면서 맞춰가야 하는 게 옳을지 몰랐다.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적어도 앞으로는 자주 집에 와야 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반면 요한은 진원에게 해장국을 만들어 주는 솜씨의 소유자였다. 또 그가 즐겨입는 무채색의 단순한 옷들은 늘 깨끗하고 구김이 없었다. 언제나 짧게 다스린 손톱도 정갈했다. 무엇보다 흡연자임에도 담배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가 가까이 오면 늘 연한 장미향이 맡아졌다.


요한 씨는 어떻게… 음식도 잘한다면서요.


또다시 시작된 요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나는 말을 걸었다.


태수 형… 사장님한테 배웠죠. 원래 중국집 요리사였대요.


아 역시. 어울린다. 사장님의 첫인상에 대한 느낌이 맞은 것이 재밌어서 나는 살짝 웃음이 났다.


돌아가신 형수님도 같이 했는데 음식장사 너무 힘들다고… 칵테일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가게도 계약했는데 그만 형수님이… 암에. 말기에 알았고 젊은 나이라 빨리 퍼져버려서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그랬다더라고요.


요한은 조용히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장님과 요한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조용히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고시원이나 원룸이나…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살고 있었는데 방 하나 더 있다고 들어오라고 하셔서. 사실 아기방이 될 곳이었는데 어렵게 임신을 해서 좋아했는데 유산되고… 유산하고 너무 몸이 안 좋아져서 알고 보니… 그랬다고.


사장님이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덩치 큰 호인에게는 그의 체구만큼이나 커다란 아픔이 있었다.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젊은 나이부터 너무 고생만 하다 병까지 걸려서… 형이, 결혼식도 못하고 여행도 못 가고 죽어라 일만 하다 간 게 너무 미안하고 한이 돼서… 아직까지 그러고 있어요. 속상하게.


이제 겨우 세 번을 봤을 뿐인 사장님의 슬픈 사연을 알아버린 것이 죄송하고 민망해서 나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자연스레 사장님의 가게가 떠올랐고 요한이 맨처음 만들어준 칵테일이 생각났다.


어머님이… 요한 씨 어머님 아니 외할머님인가요? 생존해 계세요?


나는 최대한 톤을 높여 말했다.


아니요. 엄마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이제… 기억도 안 나요. 내가 다섯 살 땐가 집을 나가서. 동백아가씨, 옛날 노랜데 알아요? 엄마가 그 노래 들으면서 울던 것만 기억나요. 왜 기억나냐면… 그때만 날 안아줘서.


‘오늘의 운세’를 보면 아마 입만 열만 망신이니 되도록 말하지 말아라, 정도로 나오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돌리는 청소기 소리에 잠이 깼을 때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찜찜한 기분이었다는 것만 떠올랐다. 운수가 안 좋은 날에는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진원이 우리의 신혼집으로 옮기는 날이 어떻게 운수가 안 좋은 날이겠는가.


아버지는 바로 재혼했고 동생들도 태어나서… 근데 아버지도 아프시게 돼서… 그러다 보니 진원이네서 살게 됐었죠.


부모 중 누구도 어린 자식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 중 어느 쪽의 친척도 가엾은 어린 혈육을 신경쓰지 않았다. 어쩌면 가까운 친척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 있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겠지. 오죽하면 피 한 방울 안 섞인 진원의 집에 의탁하게 되었을까. 요한의 부모는 대체 무슨 사정으로 틀림없이 인형보다 어여쁜 아이였을 요한을, 버린 것일까.


몰랐어요. 미안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생했어요. 앞으로는 잘될 거예요… 이런 말들은 너무 상투적이고 식상했다. 물론 그런 말들이 어울릴 만큼 요한의 사연은 신파 그 자체였다. 그리고 양부모 격인 진원의 부모들과는 소원해져버린 것까지, 마치 비정상적인 수준의 미모 대신 치러야 할 대가인 듯 요한의 삶은 기구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진 진원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여전히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자격지심과 질투에 괴로워하다가 도망치듯 멀어졌을 것 같은데. 강남에 위치한 아파트를 갓태어난 손자 앞으로 증여해준 재력의 외할아버지까지 - 신혼집은 그 집은 아니고 이재에 밝은 진원의 어머니가 그 집을 세놓은 돈을 밑천 삼아 아들의 직장 근처에 마련해둔 것이다 - 진원은 정말이지 가진 것이 많았다. 그가 내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조차 질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 중에 내가 가장 초라하고 평범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약간 우울해졌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요한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미안해요. 뭐라 해야 할지…


아니에요. 역시 진원이가 아무 말 안 했군요. 뭐 앞으로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너무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신세한탄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요한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새 들어가야 할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먼저 올라가요.


요한도 영 어색했던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일부러 웃어 보이며 네 이따 봐요, 라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가 흡연자라는 것이 그렇게나 기쁠 수가 없었다.


자기야?


현관에 들어서자 진원의 목소리가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진원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응.


잠깐 있어. 요한이 돌아오면 밥 시키자.


웬 설거지야?


어. 자기 나무젓가락 싫어하잖아. 다시 씻어놓으라고 요한이가 시켜서.


설마 이삿짐 속 먼지를 걱정했던 것일까. 우리 셋 중에 가장 살림꾼에 깔끔한 사람은 역시 요한인 것 같다.


나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 방금 물청소를 한 것 같았다.


깨끗하지? 요한이 솜씨야.


나는 깨끗한 화장실에 벌써부터 사용감을 남기고 싶지 않아 싱크대로 가서 주방세제로 손을 씻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수저와 앞접시, 물컵 몇 개의 짧은 설거지를 마친 진원이 물 묻은 손을 바지에 쓱 닦으며 말했다.


입주청소했어도 소용없더라. 아무리 큰 짐이 없어도 사람들 오고가고 금방 먼지가… 청소도 대충 해주고 가긴 했는데 요한이가 맘에 안 든다고 다시 했어. 근데 침실은 자기도 없는데 좀 그렇다고 안 들어갔어. 그래서 내가 치웠는데 봐봐. 근데 서재는 정리 못했어. 나중에 천천히 같이 하자. 자기 책들도 가져와야 하잖아.


나는 말없이 방들을 대충 둘러보았다.


당장 내가 들어와 사는 것도 아니고 진원의 오피스텔을 드나들며 그의 청소나 정리정돈 수준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더구나 치우면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또 더러워진다는 엄마의 푸념에 수십 년 간 단련된 나였다. 크지도 않은 내 방 하나 책임질 뿐이면서도 나 역시 뼈저리게 느끼는 바였다.


그래서 내가 혼수에서 가장 신경쓴 것은 로봇청소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등 ‘주방 3대 이모님’들이었다. 진원에게 이미 로봇청소기가 있었으나 나는 최신형을 새로 구입할 예정이었다. 엄마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 손이 깨끗하다는 주의에, 비싼 물건값에다 앞으로 내내 나갈 전기값이 무섭지도 않느냐는 반응이었으나 나는 까다로운 진원의 어머니를 핑계 삼아 내 목표를 관철시킬 결심이었다.


아무리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고 바쁘지도 않은 직장이라도, 출퇴근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중노동이었다. 거기에 가사노동까지, 기계와 돈의 힘을 빌면 그나마 줄일 수 있는 부분까지 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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