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常有感 - 5.
대학 때 필수과목인 기독교 수업 과제로 읽었던
구약 관련 책 속 야훼는 잔혹했었다.
인간의 자율을 허락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지도 않았었다.
용서는커녕 무섭게 벌하여 응징하였다.
적어도 그 책에서의 야훼를 나는 섬길 수 없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책
-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질문: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21세기북스, 2015. -
은 다르게 읽힌다.
붓다가 말했던 佛性이 있었다.
인간은 원래 귀하디 귀한 존재이며
神과 같은 존재라고 얘기한다는 점에서,
내게는 붓다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단지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두고 얘기한다면,
후자는 일반적으로
원죄에 좀 더 방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서는
그렇게 보이는데,
과문한 탓인지 이 책에서처럼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야훼를 나는 알지 못했었다.
물론 붓다는 깨달은 자일 뿐 신이 아니니,
야훼와 같이 취급하는 것을
그의 교조적인 신봉자들은 분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진리요 길이요 하나뿐이니,
나를 따르지 않으면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지금 너의 괴로움은 전생의 업에 따른 것이니
불성을 닦아 깨달아 이 윤회의 고리를 끊자, 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다르게 들린다.
그 차이가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게 했고,
붓다의 삶을 찾아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내 판단기준은 사실
원죄도 불성도 아닌 아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답이 나지 않는 경우,
특히나 신속하고 직관적인 답을 구해야 할 땐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일 당장,
아니면 지금이라도 당장 죽게 된다면
할 것이냐 아니냐.
그리하여
주어진 나의 生이 언제까지일지 몰라도
그저 하루하루 순간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때때로 비틀거리고 주저앉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며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최후를 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