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슬픈 날, 이상한 날 - 후편. 미운 아빠

by 지구인


오후에 동건이는 조퇴를 했다. 점심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낸 다음이었다.


마침 동건이 엄마가 집에 있었지만 동건이는 집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아빠네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결국 동건이 외할머니가 오셔서 동건이를 데리고 가셨다. 당분간 할머니 댁에서 지낸다고 했다.


할머니가 도착하시자마자, 동건이는 할머니께 매달렸다. 동건이는 엄마도 아빠도 모두 밉고 보기 싫다고 울었다. 할머니는 불쌍한 우리 강아지, 라고 하시며 함께 우셨다.


나도 눈물이 났다. 내 옆의 지우는 이미 울고 있었다.






“동건이 너무 불쌍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우가 말했다. 시우는 일찍 수업이 끝나기 때문에 하교할 때는 지우와 손을 잡고 갈 수 있어 좋다.


“그렇게 아빠랑 살고 싶어 하는데 아빠랑 못 살고. 갑자기 동생까지 생기고. 이제 새아빠랑 살게 되는 걸까?”


“이제 아저씨랑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아빠 쪽은 새엄마도 없고 혼자잖아.”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거 같애. 동건이네 아줌마 집에 잘 있지도 않잖아. 지금도 동건이는 학원 뺑뺑이인데 동생까지 생기면 아휴… 동건이 진짜 불쌍해진다.”


지우와는 이제 곧 헤어져야 한다. 아침에 집에서 있었던 일을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동건이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렇다고 전화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우네는 두 이모네와 외삼촌네까지도 한 건물에 같이 살며 가족처럼 지낸다. 아무래도 조용히 통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우의 사촌언니들이 참견하는 것도 싫었다. 내일 지우와 단 둘이 만나 이야기해야지.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기 전까지도 아빠는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아침에 얼굴도 못 봤는데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아빠 왜 전화가 없지?”


“바쁘신가 보지.”


내 말에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럼 내가 전화해야지.”


“아니, 아빠 오늘 신경 쓸 일이 많으셔.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자. 메시지도 보내지 마.”


바로 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였다.


“아빠!”


- 그래 예빈아. 오늘도 얼굴 못 봤지. 학교 잘 다녀왔니?


아빠가 취했을 때 목소리가 났다.


“아빠 술 마셨어? 발음도 새고, 이상한데?”


- 아…. 그래. 좀 마셨네 아빠가.


“할아버지 땜에 그래? 할아버지 돌봐드려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어떡해.”


- 그러게. 예빈이 말이 맞다. 아빠가 잘못했지.


“집으로 와, 아빠. 집에 와서 술 깨고 다시 가.”


- 으응…. 근데 그럴 수가 없네. 그럴 수가 없어.


“아빠!”


- 아빠가 미안해. 예빈이한테, 엄마한테도 너무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술 마실 수도 있지.”


-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아빠도 어쩔 수가 없다….


아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빠 이상하네.”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나한테 미안하대. 엄마한테도 미안하고. 그런데 어쩔 수가 없대. 술 마신 게? 할아버지 아프신 게? 둘 다 그렇게 미안할 일 아니지 않나?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미안해해야지. 그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엄마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또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엄마는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동건이네 엄마가, 동건이 동생을 가진 거 같다고?”


“응.”


“상황이 좀 그렇네. 동건이 충격이 크겠다.”


“응응. 동건이는 새아빠랑 살기 싫대. 아줌마가 재혼하면 아저씨랑 살 수 있지 않아, 엄마?”


“지금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하지만 예빈아, 아저씨도 언제까지 혼자 있진 않을 거야. 언젠가는 새엄마가 생길 수 있고 새엄마도 동생을 낳을지도 모르지.”


“동건이 아빠가? 동건이밖에 모르는 그 아저씨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정말… 모르는 거니까.”


엄마가 또다시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오늘따라 엄마는 중얼거리는 때가 많은 것 같다.


“내일 토요일이니까 아빠한테 가면 안 돼?”


계란말이로 가던 엄마의 젓가락이 멈추었다.


“아빠 할아버지 간호에 집중할 수 있게, 안 가는 게 낫겠지? 예빈이 가면 신경 쓰여서 안 돼.”


“나한테 신경 쓸 거 별로 없는데….”


나도 벌써 5학년 하고도 2학기이다. 식사만 챙겨주면 내가 알아서 잘 보낼 수 있다. 오히려 할아버지 돌보는 아빠를 도와드릴 수도 있다.


더구나 아빠 친한 친구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빠는 장례식장을 지킨다고 사흘이나 집에 없었다. 그러고 또 바로 할아버지 댁에 간 것이다. 이번 주는 동건이와 내 사정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다.


“아무래도 아빠 친구도 갑자기 돌아가시고 해서 속 많이 상한 것 같아. 나라도 옆에 있어야 술도 덜 마시지 않을까, 엄마?”


내가 생각해도 엄청 효녀스러운 말인 것 같다. 과연 나는 틀림없이 효자인 우리 아빠 딸이 맞다. 우리 딸 기특하기도 하지, 엄마가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며칠째 얼굴도 못 본 아빠가 술 취해 걸었던 전화,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과는 달랐던 순간순간들 - 그 숨겨진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 것은 한 달 뒤였다.


할아버지 수술이 잘 끝나고 퇴원하시고 난 후에도 아빠는 할아버지 댁에 머물렀다.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이 한 달까지 늘어났다.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할아버지 건강이 특별히 나빠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신다며 두 번 나를 데리러 왔다. 하지만 나만 차에 태워 가거나, 집에 들르면 커다란 가방에 물건을 챙겨갔다. 내가 물어보면 아빠는 그저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혹시 모르니까, 라고만 대답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아빠의 ‘폭탄선언’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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